homememberdaum cafee-mail
로고
아이디
비밀번호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 찾기
more
more
Home > 생명과 진리
 
글제목 새 예루살렘 - 『성의 치수들』 작성자 청지기
작성일 2005년 8월 24일 조회수 867
이 메시지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몇 가지 더 추가된 특징들, 즉 그 성의 치수와 성곽(벽)과 성의 기초를 살펴보기로 한다.

Ⅸ. 성의 치수들

A. 측정 도구

먼저 우리는 새 예루살렘의 치수들을 살펴보자. 계시록 21장 15절은 『또 내게 말하던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그 성곽을 척량(측정)하려고 금갈대를 가졌더라』고 말한다. 갈대(reed)는 척량하기 위한 것이며, 척량한다는 것은 소유로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겔40:5, 슥2:1-2, 계11:1).

측정 도구가 지팡이가 아닌 갈대라는 사실에 주목하라. 지팡이는 심판이나 징계나 징벌을 상징하거나 암시한다. 11장 1절에 따르면 『지팡이 같은 갈대』가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는 데 사용되었다. 지팡이는 징벌을 암시하므로(잠10:13, 사10:5, 11:4), 지팡이 같은 갈대는 징벌과 더불어 척량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21장 15절에는 지팡이에 대한 언급은 없고 갈대만 있다. 여기에는 심판이나 징계나 징벌에 대한 암시가 전혀 없는데, 이는 새 예루살렘의 모든 점이 완전하고 온전하기 때문이다.

이 성은 이미 모든 시험을 통과했다. 우주적이며 빛나는 여자는 그 최종 완성이 새 예루살렘인데, 이미 많은 종류의 다루심을 통과했고 네 시대 중 각 시대마다 많은 지팡이로 척량되어 왔다. 네 시대가 지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했을 때는 더이상 지팡이로 척량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이 갈대로 척량된다는 사실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척량한다는 의미이다. 가령 당신이 어떤 재산을 매입한다 하자. 먼저 당신은 그것을 척량하고 난 뒤에 그것을 소유로 취할 것이다. 여자들은 옷감 가게에서 물건을 구입할 때 그렇게 한다. 그들이 척량하는 물건의 양이 바로 그들이 구입하여 소유하는 물건의 양이다. 마찬가지로 금갈대로 척량될 새 예루살렘은 매우 적극적인 면에서 주님에 의해 완전히 소유될 것이다.

그 갈대가 금갈대라는 것을 주목하라. 금은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을 상징하므로, 여기에서 「금」이란 그 성과 그 문들과 그 성곽을 척량하는 것이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에 따른 것임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본성에 부합되지 않는 어떤 것도 새 예루살렘에 속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자기 본성에 부합되지 않는 어느 것도 소유하실 수 없다. 성문과 성곽이 있는 성 전체가 하나님의 본성의 척량과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성은 하나님에 의해 소유될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그분의 신성한 척량의 금잣대로 교회들을 척량하신다. 하나님이 교회를 척량하실 때, 그분은 우리의 지성이나 활동이나 말하는 능력 등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의 본성이 얼마나 많이 우리 속으로 역사되었는가는 매우 관심하신다. 신성한 금이 그 교회의 견고한 본체인가? 그 교회는 하나님의 신성한 본질로 짜여져 있는가? 반드시 교회는 본질적으로 신성해야 한다. 즉 신성한 본질이 교회 생활 바로 그 자체 안으로 역사되어져야 한다. 이같이 척량의 기준은 우리의 인간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을 표현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어떤 류의 사랑이 표현되고 있는지, 그것이 인간의 사랑인지 아니면 신성한 사랑인지를 판단해 보아야 한다. 겸손이나 선함에 관한 경우에도 같다. 비록 우리는 겸손하고 선해야 하지만, 반드시 우리의 겸손과 선함이 인간적인 것인지 아니면 신성한 것인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이런 원칙은 우리의 인성 각방면에 적용된다. 우리는 신성하게 인간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는 반드시 우리 안으로 역사된 신성한 본성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교회를 척량하심은 신성한 본성에 따른 것임을 부디 유념하라. 하나님의 금의 본성이 바로 유일한 기준이다.

B. 성 본체의 치수

16절에서 우리는 성 본체의 치수를 볼 수 있다. 『또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또한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젊었을 때 나는 성곽(벽)의 높이는 일백 사십 사 규빗이고 그 성의 높이는 일만 이천 스타디온이라는 사실 때문에 어려움을 당했다. 성의 치수는 그 성 자체가 일만 이천 스다디온의 높이를 가진 산(山)과 비슷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반면에 기초부터 꼭대기에 이르는 성곽(벽) 자체는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다. 일만 이천 스타디온은 칠백만 피트가 넘거나 일천 삼백 육십 마일 이상이 된다.

성에 관해서 나를 괴롭힌 또 한 가지는 그 성에 단 하나의 길만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 이 하나의 길이 열 두 문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내 의견에 의하면, 각 문에 하나씩, 즉 적어도 열 두 개의 길이 있어야 했다. 상해에서 니(Nee)형제님과 체류하고 있던 중 어느날 그는 새 예루살렘은 하나의 산이며 그 하나의 길이 보좌로부터 시작하여 나선형 모양으로 진행하면서 산 아래로 내려오고, 열 두 문 모두를 지나간다는 것을 지적하셨다. 우리가 어느 문으로 들어 가더라도 우리는 자신이 같은 길 위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 길은 나선형이므로 누구도 이 성에서 길을 잃기란 불가능하다. 설령 당신이 눈을 감은 채 이 길을 따라 걷는다 해도, 당신은 절대로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16절은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라고 말한다. 길이와 폭이 같다. 새 예루살렘이 사각형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모든 면에서 온전하고 완전하며 절대적으로 바르고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 예루살렘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는 똑같다. 즉 그 성은 각면의 크기가 일만 이천 스타디온이다. 일만 이천은 열 둘의 일천 배이다. 열 둘은 하나님의 영원한 행정에 있어서 절대적인 온전함과 영원한 완전성을 상징하며, 일만 이천은 이것에다 일천 배를 곱한 것이다.

그 치수들에 의하면 새 예루살렘은 정육면체이다. 장막에서나 성전에서나 지성소의 치수들은 그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똑같다(출26:2-8, 왕상6:20). 장막 안의 지성소는 각면의 크기가 10규빗인 정육면체였고, 성전 안의 지성소는 각면의 크기가 20규빗인 정육면체였다. 새 예루살렘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똑같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 전체가 지성소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극도로 확대된 지성소이다.

우리는 히브리서 라이프 스타디에서 지성소에 대한 우리의 체험이 반드시 계속적으로 증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메시지 52를 보라). 이것은 우리의 체험 안에서 지성소가 끊임없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먼저 출애굽기에는 보다 작은 지성소가 있고, 그 다음 열왕기 상에는 좀더 큰 지성소가 있으며 최종적으로 계시록에는 가장 큰 지성소가 있다. 결국 우리의 지성소는 길이와 넓이와 높이에 있어서 일천 삼백 육십 마일 이상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성소의 원칙이 무엇인지 보기로 한다. 지성소의 원칙은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직접 살고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에 따르면, 오직 대제사장만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지성소가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피로 말미암아 그분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었음을 계시해 준다(히10:19-22). 구속받은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거기서 살고 머물고 하나님과의 하나 안에서 교통을 누릴 수 있다. 장차 올 새 예루살렘은 바로 그러한 곳이 될 것이다. 그곳에 있는 만인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심지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고 거할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 생활은 반드시 지성소이어야 한다. 교회는 반드시 정육면체이어야 하고, 그 본성은 전적으로 거룩해야 한다.

C. 성곽의 치수

17절은 『또 그 성곽을 척량하니 일백 사십 사 규빗인데 그것은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고 말한다. 일백 사십 사는 열 둘에다 열 둘을 곱한 것이다. 열 둘의 열 두 배는 절대적인 온전함과 영원한 완전성 중에서도 절대적인 온전함과 영원한 완전성을 상징한다. 거룩한 성의 성곽은 하나님의 영원한 행정 안에서 얼마나 온전하고 완전한지! 이 구절은 그 성곽이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부활 안에서 사람이 천사와 비슷하게 된다는 것이다(마22:30). 그러므로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은 그 성의 성곽이 천연적인 것이 아니라 부활 안에 있는 것임을 상징한다.


위트니스 리
[요한계시록 라이프 스타디, "계시록 61", 한국복음서원]

 

이전글 :  새 종교를 향한 다섯 단계
다음글 :  사역의 재고 - 『서문, 머리말』
 
묻고 답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