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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 지방교회의 상호내재에 대한 비판글(펀글) 작성자 참사랑
작성일 2007년 8월 3일 조회수 1,017
첨부파일  

출처: http://cafe.naver.com/anyquestio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825


본 글은 크리스쳔시민연대에서 발행한 "이단들의 최근동향 1권"(도서출판 리폼드, 발행인: 장관섭목사)에서 올렸던 <지방교회의 양태론>중에서 상호내재 부분을 발췌한 글입니다.


4. 상호내재


"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요14;10, 11)

참으로 어려운 내용이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in) 거하는 복합적인 상호내재를 말하고 있다.
자칫 문자적으로 생각하면, 뱀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서로의 몸을 자신의 안으로 삼키는 것을 연상시킨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 거하는 이러한 상태를 어떻게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성경구절이 초대교회에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를 야기시켰던 문제의 구절이었다. 이것을 초대교회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라고 불렀는데, 그 어원은 셋이서 손을 붙잡고 춤을 추는 윤무(輪舞)를 뜻한다.
이에 대해서 위트니스 리는 페리코레시스를 “상호내재”라는 공간적인 개념으로만 정의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 셋은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 그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에 셋 모두가 이곳에 있다. 분리됨이 없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288쪽)

# 아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시존재할 뿐 아니라, 상호내재하신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영원과거에 아들과 아버지가 동시에 존재했다는 것을 듣게 되는데, 그 이유는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아들이 오셨을 때 그 분은 그분 홀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 분과 함께 계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 분이 방에 계셨을 때, 그 분과 아버지는 함께 존재하셨다."(위트니스리, 하나님, 309쪽)

# 신격의 셋은 다만 <동시에 존재할 뿐 아니라, 또한 서로 안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 가운데에는 <동시에 존재함과 상호내재함>이 모두 있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 동시에 존재함은 같은 시간에 함께 존재함을 의미한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 310쪽)

# 아버지, 아들,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했다. 나는 신격의 셋의 <상호내재와 동시존재>를 완전히 믿는다."(하나님, 305-306쪽)

이들은 자신들의 삼일신론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에 대해서, 자신들이 "상호내재"를 주장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위트니스 리의 이 개념은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세 위격의 "동시존재"의 개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삼중적으로 존재하는데, 이 셋은 분리되어지지 못하며, 항상 동시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공간적 상호내재, 동시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삼위가 한 인격이라는 장소에만 국한되어지고, 인격적으로 서로 구별되어지지 못하므로, 결국은 하나인 것이다.

# 삼위양식설은 나무나 멀리 빗나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상호내재함과 동시에 존재함을 믿지 않는다. 삼위양식자와 달리 우리는 신격의 셋, 즉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동시에 존재하며, 같은 상태 아래 있음을, 그 상호내재성과 동존재성을 믿는다(위트니스 리, 하나님 307쪽)

즉 성부 안에 성자와 성령이 함께 있고,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이 함께 있으며,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가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다. 즉 그렇기에 자신들은 양태론과 다르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이런 식으로 양태론을 정의하는 것은 스스로 양태론자가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이 되어진다.

지방교회의 주장, 즉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예수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여 영이 되었다는 양태론(계승설이라고 하는 양태론)에 대해서 토론자가 지방교회를 비판하면,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호내재의 개념도 정통신학이 말하는 상호내재의 개념과 다르며, 결국 양태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어떻게 하면 양태론을 모면해 볼까하는 궁리끝에 나온 것으로 보이며, 지방교회의 신학적 정체가 더욱 오류와 모순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위트니스 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세 단계와 세 방면으로 보았으며 한 인격, 한 실제의 세 형태를 주장한다. 그런데 그 삼위가 하나님 안에 동시에 공존하는 성분이나 요소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위트니스 리의 다음 주장을 살펴보자. 분명한 양태론이며 계승설이다.

#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은 세 개의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가지의 세 단계"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방면"이다. 예를 들어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수증기가 된다. 즉 "한 실체가 세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실체가 수증기의 상태에 이를 때에 우리가 호흡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은 성령이 받으며, 성령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가져다 준다. 하나님은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예들이 있다.(위트니스 리의 하나님 297쪽)

#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처녀의 태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아홉달 동안을 머무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인성을 그분의 피난처와 거처로 취하셨다. 분명히 그분의 성육신은 그분의 과정이었다. 두번째로 그분은 삼십삼년 반이라는 인생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 땅에서 생활하셨다. 이것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세 번째로 그분은 죽음 안에 들어가서 무덤과 음부를 포함한 죽음을 통과하셨다. 네 번째로 그분은 삼일후에 사망과 음부를 걸어 나오셔서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52-53쪽)

# 이 놀라우신 하나님은 그분의 분배를 성취하기 위해 <친히 두 단계>를 취하셨다. 성육신에 의해 그 분은 구속하는 어린양으로서의 사람, 마지막 아담이 되셨다. 그런 다음에 그분은 또 하나의 단계 인 부활을 취하셨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더 전진된 어떤 것이 되셨다. 그분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9-20쪽)

# 최종완성이라는 단어는 일이나 혹은 과정이 완성되거나 끝났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음식을 요리하는 것으로 예시할 수 있다. 요리하는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모든 식품은 날것이다. 두시간 동안 요리된 후에 식품은 만찬으로 최종완성된다. 성육신 전에 하나님은 인성이 없이 신성만 갖고 계신 날것이었다.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과 부활과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셨고 최종완성되었다. 이제 <그분은 더 이상 날 것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신성과 인생과 만유를 포함한 죽음과 능력있는 부활과 그리고 초월하는 승천을 지니신 최종완성되고 완결된 삼일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것들은 과정을 거치고 최종완성되신 삼일하나님 안에 있는 요소이자 성분이다.(세부분의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하나님. 53-54쪽)

# 하나님의 영은 <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의 과정을 통하여 최종 완결된 영이 되셨다>. 그 분은 먼저 인성을 입으시고, 그 다음 부활 안에서 인성을 신성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부터 생명주는 영이 나왔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29

#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이 땅에서 삼십삼년반을 사셨을지라도 사람 안에 들어오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 분은 가서 죽으셔야 했다>............ 그리고 그 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영이 되시어 제자들 안으로 들어가셨다.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을 갖게 했다.(67쪽)

# 그리스도는 사람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시다. 그 분의 신성한 부분은 그 영이자 <하나님 자신>이자 거룩의 영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의 온 존재>가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나 "그 분"은 자신 안에 거룩의 영을 갖고 계셨으므로 바로 그 영이 죽음에서 살리시고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게 하셨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랑의 합당한 삶. 44쪽)

위트니스 리는 성자와 성령을 성부하나님 자신이 거치는 단계와 과정으로 본다. 전형적인 양태론이다.
곧 십자가에서 죽은 분은 하나님자신이 되고만다. 이것은 전형적인 성부고난설이다.
그런데 그들은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니라는 것안데, 이러한 변명은 세가지의 거짓말이 되어진다.

1) 그동안 자신들이 정통삼위일체라고 주장하던 것이 거짓말이 된다. 이러한 정통삼위일체는 없다.
2) 한 인격이 거치는 장래의 과정과 단계가, 어떻게 한 인격 안에 삼중적으로 동시존재, 상호내재할 수 있으며, 상호교류할 수 있는 구별되는 인격이 되어지는가?
3) 위트니스 리는 분명히 한 인격, 한 실체, 한 영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스스로 오류와 모순을 갖고 있으므로 너무 유치한 주장이 된다.
즉 본인이 중고등학교 시절의 과정을 거치고, 대학시절의 과정을 거쳤다고 가정을 하자.
본인과 중고등학교 시절의 본인과 대학시절의 본인이 인격적인 상호교제를 할 수 있는가? 본인의 인격과 중고등학생시절의 본인 인격과 대학시절의 본인 인격이 서로 시간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동시존재, 상호내재할 수 있는가? 이들이 말하는
상호내재란 결국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즉 이들이 주장하는 상호내재란 그들이 양태론임을 피하기 위한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그리고 그 변명은 스스로 모순과 오류를 불러오는 이상한 견해가 되고만다.

위트니스 리는 그동안 삼위가 한 인격, 한 실체, 한 영이라고 주장하여 왔음을 이미 앞에서 살펴 보았다. 즉 그가 말하는 상호내재란 세 인격이 아니라, 한 인격이 거치는 세 단계, 세 과정일 뿐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지방교회는 자신들의 거짓말로 인하여 점점 더 망가지고 있다.
다음 위트니스 리의 글을 보자....

#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삼일하나님이 삼일하나님을 보내셨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14장26절에 의하면 삼일성의 첫 번째가 세 번째를 보내셨다. 그러나 세 번째가 보내심을 받았을 때, 그 분은 두 번째로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15장26절에 의하면, 세 번째는 첫 번째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두 번째에 의해서도 보내심을 받았다. 세 번째가 오셨을 때 그분은 두 번째로 첫 번째와 함께 오셨다. 하나가 보내심을 받을 때에 모두가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하나가 올 때 모두가 오는 것이다.(성령. 190쪽)

이미 설명하였듯이 동일인격의 세 양태는 서로 동시존재, 상호내재할 수가 없으며, 서로가 서로를 파송할 수도 없다. 그러나 성경은 성부하나님이 성자와 성령을 파송하고, 또 성자가 성령을 파송한다는 언급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방교회의 주장대로 무조건 받아들여서, 상호내재를 한 인격 안의 동시존재라고 인정하고 생각하여보자.
이렇게 보아도 이들의 주장은 오류가 곧 드러난다.

성부하나님이 성자와 성령을 파송하셨다. 또 성자도 성령을 파송하셨다. 동일인격이 동일인격을 파송할 수가 있는가?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의 인격이 나의 대학시절의 인격을 파송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위트니스 리는 삼일하나님이 삼일하나님을 보내셨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삼중적인 동시존재, 상호내재를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성부하나님이 성자와 성령을 파송하셨는데, 보내시는 성부하나님 안에서도 삼위가 상호내재하고, 보내심을 받은 성자와 성령에게도 각각 삼위가 상호내재한다면, 삼체구위가 되고만다.(언제나 상호내재, 동시존재하며, 분리되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삼체구위가 아니라면, 어떻게 상호존재, 동시존재인 삼위가 분리되어 파송되어질 수 있는가?
이들의 주장은 곧 오류로 밝혀지며, 이런 질문을 하면 지방교회는 답변을 하지 않으며, 삼신론자니 뭐니 하는 개인적인 비난만을 늘어 놓게 된다.
위트니스 리는 셋이 셋을 보냈다고 궁색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상호내재가 셋에서 함께 이루어진 것인가를 물으면 답변하지 않는다.

한 인격이 셋으로 분리시켜 보냈다면 동시존재적인 상호내재가 모순이 된다. 세 인격 중 한 인격이 한 인격을 보냈다고 하여도 동시존재적인 상호내재가 모순이 된다.
그러니 삼중적인 인격이 삼중적인 인격을 보냈다고 하여야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삼위일체가 구위삼체가 되어지고 만다. 이에 대해서 위트니스 리는 “성경은 너무 깊이 따지지 말고 그대로 그냥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이 인격을 실제로 구별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다.

이미 보았듯이 위트니스 리는 분명히
예수와 성령(부활의 영)은 상호내재가 아니라, 한 인격의 하나님이 거치는 두 단계 혹은 두 과정이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거치는 과정과 단계가 어떻게 상호내재가 되어지는가? 달리 말하자면, 상호내재되며 동시존재되는 삼중적인 존재가 어떻게 하여 거치는 단계와 과정이 되어지는가?

한 인격안에 분리되지 않고 상호 동시존재하는 세요소가 어떻게 서로 파송을 할 수 있는가?
지방교회가 말하는 삼위란 거치는 과정과 단계를 말하는가? 아니면 한 인격 안에 동시존재 혹은 상호내재하는 요소나 성분을 말하는 것인가? 이러한 주장은 양태론을 더욱 이상하게 변형시킴으로 더욱 모순되게 할 뿐이다
결국 이 변명으로 인하여 지방교회 양태론은, 일반적인 양태론보다  더욱 유치하고 황당한 주장이 되어질 뿐이다.

또 이들에게 있어서 구약의 하나님의 영과 신약의 성령과 부활후의 영(생명주는 영)이 그 개념이 다르다. 만일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성령)과 성부하나님이 각각 공존하여 동시사역을 한다면 한 인격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신약에서 예수님과 성령이 각각 공존하여 동시사역을 한다면 한 인격이 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교회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이 단계와 과정을 거치고 변화하여 최종완결된 것이 부활후 영이라는 주장이기 때문에,
오순절 이전의 성령은 부활후 성령과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만다.

더욱이 이들은 구약의 하나님의 신과 신약의 성령, 오순절 이후의 성령이 다르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정통신학도 있는지 이들에게 물어보라..... 이들은 이에 대해서 전혀 답변조차 하지 않으며, 토론자에 대해서 개인적인  비난만 퍼붓게 될 것이다.

#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영을 말하지만, 그것은 최종 완결된 영이 아니다. 여호와의 영과 성령도 최종 완결된 영도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최종 완결된 영이 계시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 후였다. 이 영은 창세기의 하나님의 영, 구약의 여호와의 영, 마태복음 1장의 성령과 다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27-28쪽)

지방교회의 삼일신론은 전통적인 삼위일체와 전혀 다르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이것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이것을 숨기고 위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들의 위험성이다. 게다가 상대방을 역으로 삼신론자로 모함하고 비난함으로서, 진정 이들의 인격과 양심을 의심치 않을 수가 없다.


이들에게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아닌, 하나님이 직접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것을 의미한다.
이들의 주장은 성경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위트니스 리라는 개인의 해석에서 비롯된 것인가?
더욱이 자신들의 주장이 전통적이라고 주장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견해가 전통적인 가르침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방교회는 자신이 전통적인 가르침과 다르다고 고백하는 위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생각하는가? 둘 중에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 전통적인 가르침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이 아닌, 아들 하나님만 성육신이 되셨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상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은 하나님이 육신 안에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 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78쪽)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주장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비록 양태론자이지만 지도자답게 그래도 당당하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지방교회는 자신들의 주장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라고 주장하며, 양태론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들을 전통적인 기독교라고 위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방교회는 아래의 주장과 같이 아들과 아버지와 영을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위트니스 리를 이단으로 공포할 수 있는가? 혹은 지방교회와 위트니스 리의 견해는 다르다고 변명할 수 있는가?

#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충고할수록 나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할 힘이 더 생긴다. 나는 성경에 따라 아들이시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그리스도가 오늘 아들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그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의 성령 48쪽)

위트니스 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동일인격임을 스스로 고백한다. 이 한마디의 고백은 지방교회가 양태론임을 명백하게 증거하고도 남는다.

지방교회가 정의하는 상호내재란 정통삼위일체가 아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그 개념은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에 있었던 완전치 못한 견해였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 삼위일체, 상호내재등의 논리는 모두 삼위일체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존재하였던 견해일 뿐이며, 실제로 그러한 견해는 모두 양태론이라는 위험한 논리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용어에 대해 위트니스 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 어거스틴은 말했다. 우리 헬라인 친구들은 한 본질과 세 실체라고 말했으나, 라틴인들은 한 본질(혹은 실체)과 세 인격이라고 말했다....이렇게 말한 것이 신비스로운 것으로만 이해된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충분하겠다......세 인격이라고 말한다면, 왜 세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가?.....우리는 그 각각을 유일한 <한 인격이라 부를지언정, 세 인격이라고 부를 수 없다>..(위트니스리 리, 성령51쪽)

위트니스 리는 이미 삼위일체의 용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단이지만 지도자다운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는 이미 용어적인 삼위일체 개념을 알면서도 굳이 한 인격의 양태론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예들인 지방교회는 자신을 숨기고 위장하며 정통신학이란 이름 뒤로 숨으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다.



상호내재의 교회사적 증거


이 부분이 지방교회가 자신들을 정통삼위일체라고 가장 자신있게 주장하는 것이 되어진다. 지방교회는 필자의 공식토론 제안에 대해서 이 주제만을 특별히 토론하자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부분에 특별히 많은 내용을 할애하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지방교회의 상호내재란 정통신학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장하기 위한 조작이다.

상호내재에 대해서 교회사적인 증거를 설명하여보자..... 과연 지방교회가 말하는 상호내재가 정통신학인가?
페리코레시스란 상호내재라고 해석하면, 장소적인 개념으로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페리코레시스”는 위격들의 상호점유[co-inherence of the persons: 헬라어로는 perichoresis, 라틴어로는 circuminsessio]라고 한다.
원래, 헬라어 "페리코레시스"는 상호내재가 아니라,
상호교류나 상호순환, 혹은 상호침투, 상호상통이라는 개념에 더 가깝다.

원래 페리코레시스(상호점유)라는 단어는 오리겐의 종속설과 이단들의 주장에 대항하여 제시된 단어였다.
즉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단들과, 혹은 성부라는 주격 안에 종속적으로 성자와 성령의 인격이 있다는 오리겐의 종속주의적인 주장에 대항하여,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이것을 반박하기 위하여 "페리코레시스"를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본질이 서로 동일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요한복음14장의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 그 교회사적인 배경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상호점유라는 용어는 삼위가 모두 동일한 신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를 제공하게 되므로서, 이단들과 종속주의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는 일격을 가하게 된다.

# 갑바도기아 모델의 장점부터 얘기하자면, 상호점유론으로 대표되는 사상은 의심할 바 없는 진보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시대에 횡행하던 이단들에 대항한 싸움에서 천재적인 일격을 가한 것이라 묘사할 수 있는 중요한 기여였다. 갑바도기아 모델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위격 들 각각이 서로 혼란이 없이 충분한 신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주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91쪽)

# 갑바도기아 삼위일체론의 기본 원리는, 하나님의 본성은 성부의 위격 안에 인격화 되었다는, 혹은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는 용어를 쓰자면, 위격화되었다는 믿음이다.

이것이 오리겐의 기본원리였다. 그러나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이 기본원리를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하게 생각하였다. 오리겐은 성부를 세 휘포타시스 가운데서 첫번째로 생각한 데 반해,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2위가 성부에게 나오듯이) 제3위가 성부에게서 직접 방출했다고 말하는 편을 선호했다(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84-185쪽)

페리코레시스란 "한 장소에 동시에 거한다"는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고,
종속주의에 대항하여 예수님도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본질을 가졌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근거로 제시된 것이다.
종속주의란 하나님이 제일 크시고, 예수와 성령이 그 하나님 안에 포함 혹은 종속되어있다는 주장을 말한다.
그 상호점유라고 하는 성경적인 증거로 종속주의는 이단적인 주장으로 정죄되었다.... 그런 점에서는 페리코레시스라는 논리는 매우 진보된 이론이었다.
다시 말하여
상호점유는 본질적인 점유, 신적본질이 동일하다는 개념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는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이유로 후대의 비판을 받게 된다.
종속주의와 같은 이단들이 사라지자 이제는 그 용어를 양태론자들이 악용했기 때문이다... 지방교회와 같은 이단들이 그 당시에도 있었나 보다.


"또한 이 말은 모든 신적인 속성 각각이 세 휘포타시스 모두에게 똑같이 돌려진다는 의미다. 즉 세 휘포타시스는 모두 전능하며 전지하며 영원하다. 이 교리는 종속론의 문제를 피하게 해주며 사벨리우스주의나 서머나의 노예투스의 성부고난설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골로새서 2:9 "그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에 대해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상호점유의 개념은 오리겐의 위계질서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진보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86-187쪽)

상호점유라는 증거는 종속주의와 같은 이단들에게 일격을 가하는 진보된 논리였다. 그러나 후에 그 용어가 위격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의문으로 비판당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용어는 오늘날의 지방교회와 같은 이단들에게 악용되어지게 된다.
즉 지방교회는 종속주의에 대항하였던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를 교회사로부터 빌려와, 자신들의 상호내재가 정통신학이라고 거짓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지방교회는 어거스틴도 동시존재적인 상호내재를 주장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어거스틴도 양태론자인가 라고 되묻는다.


이미 언급하였다시피 이 용어는 삼위일체가 전개되고 발전되어져 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진보적인 이론이었다.
그러나 이 휘포스타시스에 대한 상호내재가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어거스틴의 시대에 이르러 양태론자들에게 잘못 사용되어졌던 것이다.
즉 그들이 말하는 상호내재란 삼위가 구별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의문을 일으켰고, 그래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페리코레시스는 성공적인 삼위일체 이론이 아니었다는 평을 받게 된다.
물론 이러한 고전적 삼위일체는 이단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논리는 삼위일체가 발전되고 전개되는 과정에서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 페리코레시스란 용어는 지금도 정통신학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지방교회와 같은 상호내재는 사용되지 않는다.....그것은 양태론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영적교류 - 상호교류, 상호순환, 상호침투의 개념으로 사용되어진다.....
그래서 상호내재는 인격을 구별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유기체적인 영적교류라는 개념과 삼위가 모두 동일한 신적본질을 갖고 있다는 증거로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가 사용되어지고 있다.

김석환박사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보면 그 서문의 추천사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일부 현대신학자들이 자기들의 신학적 문제점을 감추기 위하여 이 정통교부들을 끌어와 극찬함으로서 마치 자기들의 신학적 입장이 정통임을 은근히 과시해 왔다”(추천사, 서철원교수)

즉 지방교회와 같은 이단들이 자신들의 이단적인 주장을 감추기 위하여 이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주장을 부분적으로만 인용하며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정통이라고 위장해 온 것이다.
실제로 김석환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은 구체적인 비평이 없이 교부들이 갖고 있었던 고전적삼위일체론을 그대로 저술하고 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교부들의 고전적삼위일체가 곧 정통삼위일체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여야만 한다.

다음 글의 내용은 “결론”이라는 제목으로 김석환박사가 직접 쓰고 있다.

“한편 세 번째 소주제인 페리코레시스 이론과 관련하여 헬라어인 페리코레시스 용어 그 자체를 분해해 보면, 페리코레시스 용어는 다소 정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상호내주의 의미도 포함하지만,
다소 동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상호관통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호관통(상호상통)의 의미에서의 피리코레시스에 관한 진술이 아타나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위격들의 삼위성에 관하여 진술할 때, 상호내재(공통내재)의 의미에서만 그들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김석환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349쪽)

어거스틴은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을 상호내재라는 장소적으로 알았고 상호상통, 상호교류라는 동적인 개념으로 판단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실제로 양태론자라는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결국 이 상호내재란 개념이 바로 양태론으로 발전하는 이론을 제공하여 주었던 것이다.
상호내재란 개념이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면 안된다. 상호내재는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여야만 한다.
그렇기에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상호내재라는 개념이 비판을 받아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갑바도기아 교부인 바실은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단어를 상호교류, 혹응 대자성의 관계로 강조하여 해석하였다. 그러므로써 그는 양태론자들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바실(필자주: 초대교부)은 삼위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통해서', '안에서' '함께' 라는 낱말을 구사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본성적 상호교류 또는 대자적 관계성을 강조했다. ..... 그는 신성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강조하다가 군주신론(필자주:양태론)에 빠진 데오도투스나 사모사타의 바울을 경계했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1쪽)

바실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정확하게 페리코레시스를 상호교류, 순환이라고 해석하였으며, 본성의 동일성과 함께 위격의 구별성, 별개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 우리는 위격들의 상호내재성, 즉 후에 이른바, 페리코레시스(교류, 상호순환)라고 불리우는 교리를 발견한다. <신성은 분할된 위격들 안에, 분할되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세 위격들 속에는 '본성의 동일성'이 있다. 성자는 성부 안에 있고, 성부는 성자 안에 있다. <위격들의 구별에 따라서는 둘이 별개>이나, <본질의 공유에 따라서는 하나>이다. 위엄은 둘로 쪼개지지 않고, 영광도 나뉘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 의해 설명되는 영광송 역시 복수가 아니라, 단수이다. 형상에 따른 영광은 원형에로 나아간다. 한 경우에는 모방의 이유인 형상이고, 다른 경우에는 본질에 의한 아들이시다. 그러니까 세 위격은 각각 자신 안에 한 동일실체 전부를 갖는다. 그리고 각 위격은 실체에 관한 한, 다른 위격들을 완전히 포괄하고 관통한다. 그러나 <각 위격은 한 동일실체를 전부를 갖되, 다른 위격들과 공유할 수 없는 특성>을 갖는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바실 교부의 견해, 150쪽)

다음은 갑바도기아 교부중에 한명인 그레고리의 주장이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그대는 한 빛의 섬광과 동시에 셋에 의하여 즉시 조명받아야 한다. <개별성이나 위격들에서는 셋>이다. 또는 누가 그렇게 부르기를 원한다면 위(persons)에서는 셋이다. 왜냐하면 그 음절들이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한, 우리는 그 용어들에 대해서 시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체의 관점에서는 즉 <신격의 관점에서는 하나>이다. 왜냐하면 내가 만일 그렇게 말해도 좋다면, <위격들은 구분없이 나누이기 때문>이다. 위격들은 구분 안에서 연합된다. 왜냐하면 신격은 셋안에서 하나이고, 그 셋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셋 안에 신격이 있다. 또는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셋이 바로 신격이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그레고리 교부의 견해 217쪽)

그렇다면 현대의 조직신학자가 말하는 페리코레시스에 대해서 알아보자.....
웨인그루뎀은 분명하게 독립된 삼위와 독립된 개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 그(예수)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의 연합이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전한 연합과 같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으로,
우리의 하나됨은 영원하고 완전히 조화를 이룬 것이어야 함을 (하나님의 하나됨과 같이)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삼위를 통한 비유가 대단히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개개인의 성품을 흡수해 버리지는 못할 것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음에도 그들은 <독립된 삼위>이다. 마찬가지로 어느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겠지만,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 관심 책임, 친구관계, 선호도, 욕망등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57쪽)

다음은 상호내재를 말하는 성경구절에 대해서 주석성경과 정통조직신학책을 살펴보자.
오픈2 주석성경은, 박형용교수, 유재원교수, 윤영탁교수가 주석의 감수위원으로 적혀 있다. 그 설명도 명백하게 구별되는 인격과 본질적 동일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오픈2 주석성경:(신약 172쪽, 173쪽)
14:9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듯 하나님을 본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그 분을 볼 수가 없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이심을 뜻한다. 곧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의 속성, 성품, 그분의 뜻, 계획등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성부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인격적으로는 구별 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심>을 말한다.
14:20 내가 아버지 안에....하나님과 예수님과 믿는 이들 사이의 <친밀한 영적결합>을 의미한다.

다음은 웨슬레목사가 말하는 페리코레시스이다. 그도 고유의 인격성과 함께, 본질의 단일성을 주장하고 있다.

# 웨슬리는 성부, 성자, 성령, 각자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며, 삼위의 상호내재를 주장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표현하는 신학적 용어로 '상호내재'(perichoresis)를 사용한다. 이 말은 "서로가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안에,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상호내재함으로써 서로간의 일치를 이룬다. 이와 같은 상호내재의 속성에 의해서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서로 <구별이 된다>. 이로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구별될지라도> 서로 분리되거나 떨어지거나 나뉘어지지 않는 <단일성>을 갖게된다(김영선의 웨슬레 신학)

지방교회는 위의 웨슬레의 글을 앞부분만 인용하고 뒷부분을 제외하며 인용하다가 본인에게 발각되어 큰 창피를 당한 적이 있다. 웨슬레도 상호내재를 주장하였다고 하면서 “고유의 인격성”에 대한 설명을 삭제하였던 것이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489쪽)
한분의 하나님은 단지 한분의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라, 한분의 하나님의 존재 안에 있는 세가지 관계성이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제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위격으로서는 전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이분은 아들이요, 저분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종성박사의 글이 요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주고 있다. 삼위일체에서 동일한 것은 존재 안에 있는 관계성(상호교류, 상호상통)이다. 그러나 위격으로서는 서로 전적으로 다르다(인격의 구별)는 것이다.
즉 우리는 정통신학이 말하는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교회사적인 교리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지방교회의 주장을 맞는지 틀린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거짓말을 하며 미혹을 하고 있다.

또 중요한 것은 지방교회는 이 상호내재를 장래의 하나님과 성도에게도 적용시킨다. 즉 하나님과 사람은 한 실체, 한 인격, 한 영이 된다는 것이다. 즉 신인합일론이라고 불리는 주장은 소위 하나님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이들의 구원론이며 천국관이며 재림이며 부활인 것이다.
다음 위트니스 리의 글을 보자.....

# 또한 신약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안에 거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사실은 상호내재이다. 상호내재는 연합보다 깊다. 오늘날에도 우리와 하나님은 두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된 한 실체가 될 것이다.(위트니스 리의 새 예루살렘, 391쪽)

하나님의 삼위가 상호내재되어 결국 한 인격, 한 실체, 한 영이 되었듯이, 하나님과 성도는 상호내재되어 한 인격, 한 실체, 한 영이 되어진다는 것이다,

루이스 벌콥은 지방교회와 같은 신인합일론적인 연합에 대해서도 구별되는 인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정통신학자들은 모두가 구별되는 고유의 인격, 독립적인 인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 C. 신비적연합의 그릇된 개념들. 2. 신비적 오류:
다른 위험한 오류는 신비적 연합을 신자와 그리스도의 동일성으로 이해한 신비주의자들의 그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신비적 연합에는 본질의 연합이 있으며, 거기에는 한편의 인격성이 단순히 다른 편의 인격성으로 합체가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신자는 두 개의 구별된 인격들로 남아있지 않는다.(루이스벌콥, 벌콥조직신학 하권, 199쪽)

그렇다면 이제 상호내재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알아보자.....과연 요한복음14장의 in me 를 장소적, 인격적인 개념으로 해석하여야만 하는가?

성경의 용례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빌립보교회에게 편지를 썼다.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1:30)

바울과 빌립보교인은 서로가 서로의 인격 안에 거하는 상호내재, 동시존재를 뜻하였는가?
바울과 빌립보교인은 인격이 구별되어지며 한 믿음 안에서의 유기체적인 영적연결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또 지방교회는 주와 합하는 자는 그들의 신인합일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로 “한 영”이라는 구절을 인용한다. 그러나 본문을 전후로 살펴보자.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 된다고 지방교회는 해석한다.....

그렇다면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인격이 된다는 것인가? 우리는 동일한 적용을 위하여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만 한다. 만일 주와 합하는 자가 한 영이 되어지지 않는다면, 창기와 합하는 자도 한 몸이 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본문을 앞뒤로 읽어보라.... 그 성경본문은 양태론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창기와의 음행과 음란을 비난하고 경고하는 내용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창기와의 음행과 음란을 삼가하라는 것이다. 즉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와 같은 음란함이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지는 자가 된다..... 즉 창기와 같은 음란한 자가 된다..... 그리고 주와 합하는 자는 주님과 유기체적인 연결을 하는 자가 되어진다.... 주님과 같은 거룩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창기와 창기와 합하는 자는 그 고유의 인격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남선교회가 하나가 되자"고 하였을 때에 그 "하나"가 한 인격이 되자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우리 남선교회는 고유한 인격을 구별하면서, 같은 믿음, 같은 목적의 유기체적인 연결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왜 이들은 주와 합하는 자가 한 영이 된다는 것을 한 인격, 한 실체가 되는 것을 해석하는가?

양태론을 주장해놓고 성경에서 그것을 짜깁기로 맞추려고 시도를 하다보니....이러한 엉터리 해석이 등장하게 된다. 더욱 우스운 것은, 그동안 신인합일을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던 지방교회가 이제는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는 성경본문을 들이댄다는 것이다.

이제 지방교회가 말하는 궁극적인 상호내재가 무엇인지 나타난다.
그들은 지방교회가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정통삼위일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상호내재란 결국 한 인격, 한 실제, 한 영이 되는 것을 가르킨다
결국 그들은 명칭만을 삼중적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은 삼위의 인격을 구별한다고 말한 것이 모두 거짓말로 밝혀지는 것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지방교회의 상호내재하시는 삼위하나님은 결국 한 인격, 한 실체, 한 영을 가르킨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성도를 포함하는 상호내재는 성도와 하나님이 한 인격, 한 실체, 한 영이 되는 것을 말한다.
만일 상호내재가 삼위의 인격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방교회의 신인합일도 하나님과 성도의 인격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정확히 말할 수 있어야만 하며, 그렇다면 위트니스 리의 아래 주장에 대해서 지방교회는 그가 이단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 또한 신약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안에 거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사실은 상호내재이다. 상호내재는 연합보다 깊다. 오늘날에도 우리와 하나님은 두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된 한 실체가 될 것이다.(위트니스 리의 새 예루살렘, 391쪽)

# 신약은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함께하신다고 말할 뿐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가 상호 내재하심을 계시한다. 아들이 아버지와 상호 내재한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며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7장 21절은 이런 상호 내재를 계시하는 또 다른 구절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들과 아버지는 상호 내재의 방식으로 동시 존재하신다. 이것은 그분들이 동시 존재하실 때 아버지는 아들 안에 존재하시며 아들은 아버지 안에 존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편, 33쪽)

#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다 같은 부류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고 그리스도도 우리와 하나가 되실 수 있다. 우리는 그 분과 한 영이 되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당신 안에 담기 위한 것이다.(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45쪽)

# 그분은 우리와 같이 되셨다. 왜 그런가? 그 목적은 우리를 그 분과 똑같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과 똑같은 것이다.(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63쪽)

지금까지 살펴본 양태론과 신인합일론, 이 두가지가 위트니스 리는 성경의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공급(양태론)과 분배(신인합일)라고 말한다.

 

참사랑
저에게 상호내재에 대해서 묻길래, 발견한 글중에서 공감이 가는 글을 발췌해서 올립니다. 물론, 지나치게 양태론으로 몰아치는 감이 있기는 합니다만..그래도 큰틀에 있어서는 저의 생각과 크게 틀리지 않다고 봅니다. 그리고, '형제'님께서 어거스틴의 상호내재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어보시는데, 제가 본 바로는 del modify 2007/08/03
참사랑
윗글과 크게 다르지 않고, 지방교회의 상호내재는 어거스틴의 상호내재와는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알기로는 어거스틴의 <그래서 한분 한분이 다른 한분 한분안에 계시며, 모든 분 안에 계시며, 모든 분이 모든 분안에 계시며, 모든 분이 한분안에 계시다>라는 글을 인용하시는 것 같은데, 이 부분을 좀더 명확하게 풀어서 del modify 2007/08/03
참사랑
설명이 가능합니까? 그러면, 제가 좀더 이해하기 쉬울것 같은데요..어떤 글이라도 좋습니다. 의외로 지방교회에서 상호내재는 많이 얘기하는데, 구체적인 자료가 많이 없는것 같아서요..부탁드릴수 있을까요? del modify 2007/08/03
mowado
이 문제는 사람으로서는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보여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해서는 신성하고도 비밀합니다. 우리가 컴퓨터로 상호 교통을 하지만 약 30년쯤 전에는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우리 사람의 일도 이러한데 하나님의 일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제발 사람의 어떠 글을 del modify 2007/08/03
형제
그야말로 완전히 짜집기 글이라서...논지가 뭔지, 기준이 뭔지를 알수가 없는 글입니다. 감리교 평신도(권사) 이인규님 개인 주장도 보이고, 어거스틴이 맞다는 것인지 틀렸다는 것인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한 마디로 개혁신학은 기준이 되는 삼위일체가 현재로는 없다는 저의 지적에 답이 될 수 없습니다. 개혁신학의 기준 del modify 2007/08/03
형제
이 되는 신학을 제시해 주십사 하는 저의 부탁에는 언제 답을 주실 것인가요 참 사랑님.... del modify 2007/08/03
참사랑
윗글이 좀 길기는 했지요..님의 불편하시다면, 제가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재정리를 해보도록 합지요..^^ del modify 2007/08/03
형제
상호내재 개념이 셋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삼신론이단으로 빠지는 것을 고민하던 정통신학자들이 삼신론이 아니면서 그렇다고 양태론도 아닌 묘안으로 제시한 것이 '페리코레시스'임을 아신다면 무책임하게 '페리코레시스'를 위와 같이 다루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설픈 분들이 이단을 판단한다며 더 혼잡스럽게 하고 del modify 2007/08/03
형제
있는 또 다른 현장을 보니 왠지 씁쓰름 합니다. 참사랑님, (지방)교회 신학이 어거스틴과 다르다면 님의 신학은 어거스틴과 같습니까? 아니면 다릅니까? del modify 2007/08/03
참사랑
님은 늘 이쪽이야 저쪽이냐, 이단,삼단등에 많은 경륜(?)이있어 보이십니다. 왜, 늘 곁가지만 잡고 흔드시는지..주제에 대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토론을 하는 것이 자신의 체험으로도 좋을듯 싶습니다. 실제없이 다른 글들을 가지고 아무리 제시해도 자신의 것이 되지 않지요. 그것은 그야말로 교리에 불과할것입니다. del modify 2007/08/03
참사랑
교리만, 가지고는 깊은 토론을 할수가 없습니다. 삼일성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자신의 교리,지식에 100% 확신할수 있는 분이 얼마나 있을까요? 님에게는 그런 고민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저는 현재까지는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을 존중합니다. del modify 2007/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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