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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 은사의 관점에서 본 제직선출과 제직훈련 제안(목회와 신학) 작성자 lovelife
작성일 2008년 4월 30일 조회수 1,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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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할 만한 글같아서 올려봅니다.

은사의 관점에서 본 제직선출과 제직훈련 제안
          

   어떤 교회는 제직의 숫자가 출석교인의 반이 넘는다고 한다. 어떻게 제직의 수가 그렇게 많을 수 있냐고 묻자, 다른 교회들도 대개 그렇지 않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문제는 이렇게 제직은 많은데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할 때면 항상 일꾼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교회 행사할 때마다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이 모임을 가나 저 행사에 가 봐도 열심 있는 몇 사람만 고정 출연하다시피 일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교인의 반 이상을 장로, 안수집사, 집사, 서리집사, 권사, 권찰 등 각종 직분으로 제직화하는 현상에 대해 지적하게 되면, 그렇게라도 직분을 안 주면 그나마 누가 나와서 봉사하겠냐고 한다. 심하게 말해서 매직(賣職) 행위와 다를 바 없는데, 직분 판매로 교회를 꾸려갈 수는 없지 않은가?

직분 호칭 바뀌는 재미라도 있어야 교회 나온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적지 않은 우리 한국 교인들의 심성 속에는 직분을 명예로 보는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오랫동안 기도 많이 하신 어머니들의 평범한 평생소원은 당신 아들이 장로 되는 거란다. 그리고 점점 나이 들면서 계속 집사님이라고 불리는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그 전에 빨리 권사 따야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한다. 장년 남자 분에게 ‘형제님’ 하면 불쾌하게 생각할까봐, 확인도 하지 않고 ‘집사님’이라고 불러드리는 것이 예의다. 조금 더 연세 드신 분이면 대충 눈치 봐서 우선 ‘장로님’이라고 불러드려야 불쾌해 하지 않는다는 게 기독교 예의범절처럼 되어가지 않는가? 이 정도면 시장이나 상점에서 손님에게 대충 사장님이라고 불러대는 상인들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고 성경적 이상과 목회 질서를 추구하며, 제직임명에 어떤 제한과 조건을 걸어서 조금 까다롭게 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심지어 다른 교회에 가서 권사직을 받고 돌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제직문제는 목회에 있어서 쉽지 않은 일이요 딜레마다. 사실 그런 제직이 교회 안에 많아진다 해도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이 늘지는 않는다. 게다가 일단 제직으로 임명되면, 그 다음부터는 훈련도 더 이상 받지 않으려 하면서도 그 보직(?)만은 평생 유지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보직을 은근히 자랑하며 산다.

반면, 성경을 연구해보면 교회에서 봉사의 직분을 맡은 자는 슈나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의 지적처럼 단순히 하나님의 도구요, 그리스도의 종이요, 성령의 기관일 뿐이다(고전 4:1; 12:4~6). 따라서 교회 직분은 다른 인간의 제도와 기구에서 주는 직분과 근본적으로 다른 기독교적 특징이 분명히 나타나야 하며, 제직들은 장로나 권사 등 자신의 직분에 대해 전혀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원론적인 얘기보다 제직문제에 대한 우리 목회자의 관심은 ① 누구를 제직으로 선발해야 하며 ② 어떻게 선발해야 하는지 ③ 어떻게 일을 시키며 ④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등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에 대한 지침을 얻는 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을 스스로 묻고 정리하지 않으면 제직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 근본적인 질문은 ‘제직, 그들은 누구이며, 무엇하는 사람인가?’에서 찾는다.

제직선발 문제보다 교회론 이해가 더 중요

직분 문제를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은 초기 교회는 어떠했냐고 물으며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한다. 그렇지만 초대 교회가 항상 오늘날 교회에 그대로 복사할 수 있는 정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과거 초대교회는 제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서로 가족으로 여겼기에 조직, 부서나 기관도 당시에는 없었다. 그러나 점점 교회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복잡한 조직과 제도를 갖추게 되었다. 물론 이런 제도목회는 전적으로 목회사역에 헌신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므로, 사역자가 다른 일에 정력을 소모하지 않게 하는 좋은 점이 있다. 교회 내의 질서유지에도 좋다. 그러나 교회가 제도목회에 매여 있게 되면 나머지 사람들 곧 대다수 교인들은 제도권에 영입되지 않는 한 별로 일하려 들지 않기 마련이다. 그래서 교인의 반 이상을 제직으로 세워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제도사역의 문제로 인해 극단적 반발 형태를 띠는 것이 카리스마적 사역구조에 대한 관심이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다 똑같으며, 은사에 따라 평등하게 일하며, 복수 지도체제를 갖출 것을 주장하며 법적, 제도적 장치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한다. 그런데 모두가 서로 지도자로 자처하고 모두가 리더라면 그 공동체에는 참된 지도자도 책임자도 없는 셈이다.

사실 기독교 사회신학자 데렉 팃볼(Derek Tidball)의 지적처럼 교회에서 제도사역과 카리스마적 사역 두 가지를 엄밀히 구분할 수는 없다. 서로 중첩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상당히 고정된 규정과 권위적 위계서열 등의 관료체계와 조직으로 움직여 가는 제도목회 구조를 갖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성경적 공동체의 이상은 제도목회 방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극단적인 카리스마적 사역구조를 제직사역의 기초로 삼을 수도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두 가지 극단적 형태가 아닌 건전한 제직 세우기와 건강한 사역의 길은 무엇일까?

제직문제를 제대로 풀려면, 먼저 목회개념의 변화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목회란 무엇이고, 교회란 무엇인가’란 본질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목회는 안수 목회자만의 교역이란 개념에서 벗어나, 교회 공동체의 사역이란 개념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물론 안수 목회자는 고유사역의 역할이 있지만, 진정한 목회는 교회 공동체 전체가 사역에 참여할 때 이루어진다. 따라서 진정한 목회를 위해서는 모두가 사역에 참여하는 구조가 되어야 하며, 그 중 제직은 만인제사장으로서 섬기는 모든 성도들의 지도자들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 말은 제직에게는 안내와 주보 나눠주기, 예산집행 등 행정봉사 외에도 더 본격적인 사역훈련과 리더십에 대한 이해와 훈련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며, 그에 따라 뽑는 기준도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될 것이다.

교회조직은 은사 관점에서 세워져야

직분과 은사에 대해 다루고 있는 성경구절들(고전 12:8~10; 28~30; 롬 12:6~8; 엡 4:11)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영적 은사와 직분들의 순서가 제각기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같은 저자인 사도 바울이 직분과 은사를 열거하는데 왜 일관된 순서로 하지 않고 모두 다르게 했을까? 그것은 직분을 일정한 계급구조의 서열개념으로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직분이나 은사는 서로 동등하지, 오늘날 교회에서 갖고 있는 통념처럼 ‘장로 아래 집사’ 방식의 계급구조가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제도목회 구조의 문제점 중 하나는 교회 지도력이 위치적, 신분적 리더십 형태로 굳어지게 되는 것이며, 비성경적인 계급구분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목사와 평신도 간의 분리에서 끝나지 않고, 거기서 제직도 계급 서열화가 시작된다. 목회자를 추기경과 사제로, 감독과 일반 목사로 나누듯, 제직들도 장로와 집사, 서리집사로 서열화된다. 그러나 제직구조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의도와 다른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과 18절 등이 보여주듯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는 다양한 은사와 직분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므로 성도들은 서로 평등하고, 상호 의존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장로가 집사를, 안수집사가 서리집사를 아래 계급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서리집사라서 어떤 사역의 책임자가 될 수 없고 안수집사 중에서만 선출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도 설득력이 없게 된다. 은사와 열정이 있고 그 사역에 적합한 열매가 있다면 사역의 책임자로 세울 수 있다.

은사의 관점에서 다시 봐야 할 현대 교회의 제직구조 중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칼빈과 종교개혁가들은 교회의 주요 4가지 직분을 얘기할 때 교사직을 장로직과 함께 다뤘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는 그 네 가지 직분에 없는 권사직은 교회의 주요 직분으로 여기는 여유를 보이면서, 교사(물론 칼빈이 말한 것은 신학 교수직에 더 가깝지만, 오늘날 개교회에서는 성경교사, 목자, 제자훈련가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는 그 수와 기여가 적지 않은데 제직으로 여겨주지 않는다. 교사가 집사 직분을 따로 받지 않는 한 제직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교회사역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도 어렵다. 사역과 봉사가 제직구조와 이원화된 문제다. 목회자와 실천신학자들은 교회와 제직구조에 있어 직분과 은사의 관점에서 더 성숙한 발전방안을 모색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직의 역할: 행정이 아니라 사역

참된 목회의 본질은 신뢰관계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적지 않은 교회의 목회자와 제직과의 관계는 견제구조로 비춰진다. 목회자들 중에는 제직을 지배하고 조종하려 하고, 그에 대해 장로들은 목사의 독주를 막도록 견제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천사 중에는 아키엔젤(archangel; 천사장, 유 1:9 등)이 있지만, 교회에서는 사람에게 맡겨주신 어떤 직분도 그 명칭 앞에 arch란 단어가 붙는 것이 없다(archbishop, 대주교는 제도적 교회용어이지 성경상의 용어는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인이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경의 직분들은 항상 섬김과 사역(diakoneo)이란 단어와 관련되어 있다. 목사직은 물론, 안수집사나 장로 등 모든 직분은 섬기라고 준 것이지 다른 성도를 통치하고 지배하는 권세나 힘 같은 것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다. 에베소서 3장 7절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고 한다. 직분과 일꾼 됨은 이처럼 복음사역을 위해 함께 협력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일 뿐이지 다른 직분을 통제하고 견제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 제직구조나 조직을 짤 때, 철저하게 몸과 지체라는 구조로 이해하고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제직은 많아도 일하는 사람이 없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섬김 중심이 되게 해야 한다. 제직들은 교회에서 봉사할 때도 서류에 도장 찍고, 실제 사역하는 사람들이 낸 재정신청서에 서명하고, 회의를 열어 결정하는 행정직 역할만 하려고 하는데, 실제로 가르치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사역을 하도록 일깨워야 한다.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목회자가 할 일이다. 목회자는 조직표 짜는 사람이 아니라, 사역을 하도록 세워주는 사람이다.

목회 리더십의 허점, 유기체 교회를 조직체로 인식하는 데 있다

목회자의 역할은 주의 백성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데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 비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므로 함께 할 수 있는 일꾼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처럼 목회 리더십이란 것도 교회를 조직체보다는 유기체로 기능하게 하는 것이며, 위원회보다는 공동체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직임명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교회와 사역에 대한 개념이 바로 형성되도록 교육과 양육을 잘하는 것이다. 사역할 때 목회자의 핵심 역할은 에베소서 4장 12절이 가르쳐주듯 성도들을 무장시켜 그들이 자신들의 사역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이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는 일상 목회에서 그 개념을 충분히 다루지 않은 상태에서 제직을 임명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사람들을 집합시켜 놓고 별안간 직분교육을 하려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상시 목회가 교육과 훈련의 목회여야 한다. 이 때 교육과 훈련 목회라는 것은 성경공부를 시켜서 성경지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교회의 개념을 바로 파악하고 자신들이 만인제사장 사역자임을 알게 하고 사역자로 섬길 수 있게 무장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직훈련도 그러한 배경에서 출발해야 한다.

제직선발은 담임 혼자가 아닌, 교회 공동체가 주도하라

제직의 기본 자질은 목회서신에 나와 있고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누가 어떤 방식으로 세워야 할까? 열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고 세우셨지만,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세울 때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금식하며 기도한 후 두 사람에게 안수했고(행 13:2), 예루살렘교회가 일곱 지도자를 세울 때도 온 무리가 세우고(세우는 것은 항상 교회였다. 무리가 존경하는 암브로스를 감독으로 선출하는 등 못마땅한 일이 생기자 4세기 말 라오디게아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회중 선출을 금지할 때까지 그렇게 해왔다), 사도들이 그들에게 기도하고 안수했다(행 6:5~6).

또한 디모데전서 5장 22절에도 안수가 나오지만, 이 경우도 교회가 세운 사람에 대해 사도가 인정하고 인준하는 것으로 초대교회에서는 이해하고 있었음을 교회사가 볼츠(Carl A Voltz)는 지적한다(「초대교회와 목회」, 23쪽 참조).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오늘날 교회에서 제직을 세울 때 담임목사 혼자 임명하는 방식은 목회자의 권위유지에는 도움이 되지만 실제로 발생되는 문제점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교회 공동체가 제직을 뽑고 세우면 목회자가 기도로 인준하고 세우는 방식이 좋다는 것이다. 실제로 주차요원 등으로 일정 기간 이상 봉사하며 교인들이 그를 알고 인정하여 선출한 장로와, 공동체 가운데 아무런 봉사 없이 목회자 주도로 선출된 장로가 미치는 영향력 차이를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보고 있지 않은가?

제직선발 방식이 바르게 자리 잡히게 되면 단지 제직이 목사가 뽑은 목사의 심부름꾼이 아니라, 교회의 일꾼으로 인식될 것이며, 교인들도 제직들을 존경하고 제직들도 교회 안에서 책임 있게 행동하게 된다. 이 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직분은 자신의 명예가 아니며, 오직 교회를 섬기기 위해 존재할 뿐임이 분명해질 것이다.

또한 직분은 계급이 아닌 기능일 뿐이다. 따라서 자신이 그 기능을 못하면 다른 이가 하도록 넘겨주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할 때 장로 임기제 같은 문제도 법리적 논쟁으로서가 아니라, 성경과 사역의 본질 속에서 자연스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섬김과 사역측면에서 볼 때 이처럼 직분은 영구불변 계급장이 아니며, 임직식은 여왕이 작위를 내리면 평생 그 신분이 유지되는 귀족신분 수여식이 아니다. 따라서 제직의 선발기준도 자연스럽게 교회에 출석한 기간이나 재정적 기여도가 아니라, 은사와 사역적 능력과 자세 그리고 성숙도가 되어야 한다.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냐 아니냐는 교인이 얼마나 많고, 제직이 몇 명이며, 건물이 얼마나 큰가, 혹은 얼마나 많은 부서와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가로 판단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생명을 살리는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가로 가늠되어야 한다.

세계 교회의 주목을 받고 모델 목회를 해온 윌로크릭교회나 새들백교회가 한국교회들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이 무엇일까? 열린예배가 아니다. 교회에 천 명 교인이 있다면 그 중 백 명도 안 되는 사람만이 봉사하는 우리의 보편적 현실에 비해, 그 교회들은 만 명 교인이 있을 때 7~8천 명 이상의 교인들이 각양 봉사와 사역에 참여했다. 실제로 오래 전 필자가 참석했던 윌로크릭 리더십 컨퍼런스 때는 1주일 동안 5천명 이상이 곳곳에서 봉사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교회의 힘은 이러한 봉사였지, 단순히 건물과 시설과 음악과 드라마가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을 제직으로 세워야 그 중 책임감(죄책감?) 느끼는 몇 사람이라도 더 봉사할 것 아니냐는 산탄총 사냥식으로 목회해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세우는 방식과 훈련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은사와 제직의 사역이해: 공동체와 사람을 세우는 데 기여

어떤 분들은 “대형교회야 재주 많고 좋은 인물들이 많아서 되지만, 우리 같이 작은 교회는 일꾼이 없어요”라는 말을 하고 싶을 것이다. 분명한 점 하나는, 하나님은 각 교회에 사명을 주신다는 점이다. 그리고 동시에 분명한 또 한 가지는, 그 일을 맡기실 때 하나님은 그 일을 가능케 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시고 그 일꾼들이 사명을 성취해낼 수 있도록 영적 은사를 분명히 주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성경적 원리다. 그러나 만일 아무리 이렇게 찾아봐도 교회에 그런 은사를 가진 일꾼이 없다면, 당신이 주장하는 교회의 사명과 해야 할 일이란 것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 아니라 목회자 개인의 야망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점검해보라!

은사가 없는 사람을 제직으로 임명해놓고 “목사가 시키니까 순종하는 마음으로 맡고, 그 일을 해내라!”고 명령하는 것은 목회 지도력에 있어 권한의 남용이요 폭력이다. 은사는 목사가 직분 맡기며 주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목회자는 제직들로 하여금 그 은사와 재능을 발견케 돕고,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면 된다. 신앙생활이 즐겁고, 제직들의 섬김이 기쁘도록 돕는 것이 성경적 리더십이다.

다음으로 이해해야 할 점은, 성령의 능력 주심과 성령의 은사는 개인 경건의 목적보다는 공동체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고린도전서 12장 7절은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심이라”고 했다. 여기서 유익하게 하려 함이란 말은 공동선을 위한(sympheron) 것이란 목적성을 보여준다. 고린도전서 14장 4~5절에서 개인적 경건에 유익한 방언사용보다 예언의 은사활용을 귀히 여기는 이유도 교회를 세워(oikodomeo) 간다는 관점이 같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은사나 성령의 능력 주심의 궁극적 목표는 공동체를 섬기고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지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제직은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를 알고자 해야 하며, 사역을 위해 주신 성령의 나타나심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해해야 할 것은, 은사는 제도 유지를 위한 도구가 아니란 점이다. 몸 곧 사람들을 세우기 위함이다. 은사를 받는 것도, 제직으로 취임하는 것도 모두 교회를 세우는 것 때문이지 자신의 영광과 명예 혹은 목회자가 필요로 하는 곳에 써먹기 위한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제직훈련과 리더십 부여

목사는 제직훈련 방법을 원한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의 조직방법, 일하는 방법에 대한 특별한 지침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것은 각 교회마다 다른 상황에서 목회자에게 맡겨진 임무요 여유 범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직을 세우는 데 있어 어려움은 우리 목회자들이 신학교 강의실에서 받는 교육을 통해 주로 성장해왔다는 점에 기인한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경험적으로 느끼듯이, 강의를 듣고 공부했다고 사역을 잘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제직훈련 방식이 단순한 교실 교육방식을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학교 방식의 교육으로 제직을 세워놓고 사역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줄 수 있는 실제적 훈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제직들은 도장 찍고, 재정 감사하는 행정역할만 할 뿐 복음을 전하고, 말씀으로 양육하고, 사람을 세우는 일은 목사 한 사람에게만 요구할 것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제직에게 리더십에서 말하는 능력 부여(empowerment)를 해줘야 한다. 일을 맡김에 있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세우면, 그는 두려워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머지않아 탈진해 포기하거나, 빨리 새해가 오기만 기다릴 것이다.

제직 세우기와 제직훈련을 위한 제안

따라서 참된 제직 세우기와 사역을 위해서는 제직훈련이 바뀌어야 한다. 올바른 제직 한 명을 더 세우려면 교리교육과 성경공부만으로 끝나지 않고 구체적인 은사발견, 은사배치 프로그램, 그리고 각 직무별 역량개발과 함께 지도자 영성과 리더십 교육 등이 다각도로 이루어져야 함을 알아야 한다. 제직을 세워놓고 목사인 자신을 도와주기를 기대했던 목회자들에게 이러한 제안은 일만 더 늘어나게 하는 듯 난처한 주문일지 모른다.

이것은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캐나다 리젠트신학교의 실천신학 교수인 폴 스티븐스는 엘튼 트루블러드의 주장을 이렇게 인용했다. “평신도들은 목사의 비서가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목회자가 평신도들의 비서가 되어야 한다”(폴 스티븐스, “평신도를 세우는 목회자”, 「미션월드 라이브러리」, 171쪽). 그의 말처럼 이제는 제직이 목사의 비서가 아니고, 목사가 제직을 위한 비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목회관을 너무도 심하게 뒤엎는 것처럼 여겨져서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교회의 사명을 이루기 원한다면, 그 일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제직구조도 기업이나 군대식 조직표로 짤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은사에 따른 일꾼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교회의 일꾼을 세울 때는 ‘세상에서의 위치나 신분에 따라서는 안 된다’는 기본원칙이 우선 지켜져야 한다. 제직들을 세울 때 행정 조직표의 빈칸 채우기 방식은 분명히 포기해야 한다. 그 대신 제직들의 영적 은사에 따라 사역을 선택하거나 배정받도록 하자. 위원회 구조를 가진 교회라면, 교회 출석의 연륜과 나이를 근거로 해서 연공서열에 따라 위원장직을 배분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가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리더십 없이 방치해놓으면, 영적으로 미성숙한 위원회 멤버들은 은사와 관계없이 자연스레 연장자 순으로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뽑아오게 될 것이다. 그 후에 목사가 조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므로, 각 위원회 자체에서 위원장 선출을 하기 전에 반드시 사역의 은사와 열정과 역량에 근거해 선출해야 함을 가르친 후에 시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로나 안수집사 혹은 권사를 세울 때도, 교회 출석과 십일조 등 헌금 상황만 볼 것이 아니라, 현재 교회의 어떤 사역에 개입되어 있는가를 기본사항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럴 때에 제직사역의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다.

제직들이 전통적인 행정봉사를 넘어, 사역봉사를 할 수 있도록 사명을 수정하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재훈련해야 한다. 그리고 사역봉사를 하고 있지 않는 제직이나 행정가 위원장들이 교회의 중요한 결정을 하지 않도록 교회의 운영구조를 서서히 바꿔가야 한다. 교회사역은 사역에 개입된 사람이 해야지 행정가들의 역할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교회정책과 행정은 항상 그 일에 대해 고민하고 기도하고 생각하며, 항상 교회에 머무르면서 지속적으로 그 일에 책임질 수 있는 풀타임 목회자와 직원의 일이지, 일주일에 하루 이틀 나오는 제직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행정조직으로 보는 사람은 행정관료 개념의 제직구조로 교회를 계속 운영하겠지만,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으로 사역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사람은 은사중심 사역을 하는 일꾼구조로 목회할 것이다.

교회의 목회현장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대개, 전도를 해보지도 않고 전도할 줄도 모르는 제직이 전도사역에 대한 예산을 짜고 인력과 시설배정 문제를 결정하는 것과 같이, 행정가와 실무 사역팀과의 간격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정하는 제직과 사역하는 일꾼이 서로 다른 이원화 구조를 피하고 사역하는 성도들이 제직이 되도록 교회조직의 근본을 바꿔야 한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위원회 내의 투표나 다수결, 혹은 박수로 분위기 몰아가기 방식에 의한 선출이 아니라, 교회 목회팀과의 협력하에 은사와 열정과 열매에 따라 제직이 세워질 수 있도록 연말에는 전교인 대상의 사전 교육이 있어야 한다. 이 때 교회는 위원회와 위원장 구조가 아니라 사역팀과 팀장 중심 제직구조로 본질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업형 행정관료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탈피하여 사역중심 공동체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제직이나 사역팀장 혹은 위원장을 세울 때, 제자훈련 과정을 몇 가지 수료해야 하고 거기에 더해 몇 개의 사역훈련(전도·상담 등)을 마쳐야 한다는 식으로 조건을 너무 까다롭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훈련 없이 제직을 세우는 교회들의 문제점 때문에 발생한 이런 전통적인 학교 시스템 방식 혹은 자격증 방식의 강화책이 질적 수준을 높이는 이상적 방법으로 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대다수의 제직들이 사역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커트라인을 높여 막아버리는 결과가 된다.

오히려 교회가 정한 전교인 필수과정을 거친 자라면 그 이후 2가지 정도의 단기수료가 가능한 훈련만 요구되고(최소한의 훈련 요구는 필요하다), 은사와 기질과 사역 열정에 따라 언제든 제직으로 사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며, 동시에 사역역량이 부족한 사람들은 제직으로 임명된 후 계속 훈련을 받을 수 있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좋다(필자의 「셀교회 전환과 셀리더 세우기」 8장 참조).

이 모든 제직구조의 변화는 목회자의 설교와 평상시의 가르침과 훈련을 통해 교회에서 제직의 신분이나 위치보다 사역이 중시되고, 행정적인 일보다 사역 봉사가 중시되며, 이름만 있는 행정적 제직 호칭보다 목자 등 사역직분 호칭이 더 중시되고 명예롭게 여겨지는 성경적 교회문화가 형성될 때 가능하다. 그런데 목회 리더십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교회문화를 형성하는 것이므로 이 부분을 소홀히 여기면 안 된다.

동시에 목회자는 교회 상황에 따른 사역의 종류와 그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은사와 기술, 그리고 성향이 함께 서술된 사역 직무표를 개발하여 교회에 비치해야 한다. 이 일은 담임목사가 주축이 되어 부교역자는 물론 제직들을 참여시켜 교회의 프로젝트로 삼아 행하는 것이 좋다. 사역 직무표와 함께 제직은 물론 성도 각자가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은사배치 사역이 교회 안에 자리를 잡도록 해야 한다. 이 때 목회자는 제직들을 미리 훈련시켜 각 사역팀의 지도자로 일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해주어야 하고, 제직들이 각종 사역에 개입될 때만 그 직분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제직훈련을 위해 매년 행하는 신년 축복성회 등 부흥회 대신 제직 직무훈련, 은사배치 사역, 리더십 훈련, 가치관과 비전 워크숍, 각종 사역세미나를 시도해볼 수 있다.

특히 제직임명과 각 부서 임직 교체 전후에, 혹은 연말과 연초에 항존직 세미나와 제직훈련을 이런 주제로 시행해보기 바란다. 제직임명이 끝난 후에는 전교회적으로 사역축제를 열어, 각 사역팀이 자신들의 사역을 소개하고 혹시 아직도 사역에 개입되어 있지 않은 제직이 있다면 그 기회를 통해 사역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도 좋다. 물론 이것은 앞에서 얘기한 은사와 사역 중심적 제직구조가 완성되면 할 필요가 없는 과도기적 과정이다.

각종 사역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제직들이 활동적으로 섬기는 교회들은 세계 어디를 가나 모두 이런 프로그램을 상시 운영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윌로크릭교회는 네트워크 은사배치 사역을, 새들백교회는 OO프란 명칭의 사역을 통해 백 가지가 넘는 사역직무 기술서들을 이미 작성해 놓았고, 나름대로 은사발견 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므로 한국의 각 교회 상황에 적절하게 맞도록 만들면 될 것이다. 물론 국내에도 이런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각 교회에 맞게 잘 시행하고 있는 중견 교회들이 있으므로 벤치마킹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제직이란 말은 성경에 없지만 그 직분에 해당하는 단어를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일꾼’[(diakonos; 집사(deacon), 사역자(minister)로도 번역됨]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골 1:1)이지만 자신의 본분을 ‘복음의 일꾼’(골 1:23)이라고 묘사했다. 일꾼으로 살기 위해서 그는 최선을 다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성령의 능력과 은사, 1:29)에 따라 행했다. 또한 이런 복음의 일꾼은 항상 각 사람을 권하고 가르치며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1:28 사역) ‘교회의 일꾼’(1:25)으로 산다.

이 원리처럼, 직분과 더불어 장로와 집사 호칭을 받은 일꾼이 복음사역은 하지 않거나 할 역량이 없다면 교회의 일꾼 곧 제직이라 불려서는 안 된다. 이 성경적 진리를 진리 되게 만드는 것이 우리 목회자의 사명이다. 교회마다 행정관료 직분자는 넘쳐나지만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세우는 사역을 감당할 사람은 희귀해져버린, 이상한 제직구조를 넘어서 은사에 따라 모든 제직이 함께 사역하는 공동체 구조로의 변혁을 새해에는 이루어보기를 함께 꿈꿔보자

김덕수 2004. 11

http://www.duranno.com/moksin/ctg_detail.asp?CTS_ID=8098&CTS_YER=2004&CTS_MON=11&CTS_CTG_COD=0

형제
성경적인 교회론, 성경적인 교회실행을 사모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주님이 그 필요들을 넉넉히 채워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런 제도 이런 실행은 과연 성경의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 성경에는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자꾸 해 보는 것도 해답을 성경에서 찾는 첫걸음이 del modify 2008/05/04
형제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떤 분은 교단 헌법에 열거된 성경구절들을 정말 그것이 이내용들을 지지하는지 일일이 본문들을 다 찾아보기도 했답니다. 매우 좋은 추구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돌 다리도 두드려 보는 식이지요. del modify 2008/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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