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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 re:영과 혼의 혼합이라는 교리에 대해서 작성자 아라우나
작성일 2008년 6월 30일 조회수 1,095
첨부파일  

영은 헬라어로 "프뉴마"로서 영적인 세계와 관련이 있는 기관으로

양심, 직감, 교통의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혼은 헬라어로 "프쉬케"로서 정신 세계와 관련된 기관으로

생각, 감정, 의지의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몸은 헬라어로 "소마"로서 물질적인 세계와 관련된 기관으로

우리의 신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헬라어로 "칼디아"로서 우리의 혼의 세 부분(생각, 감정, 의지)과 영의 "양심"을 합해서 부르는 명칭입니다.

정신은 혼의 기능과 관련된 혼의 또다른 번역 용어 입니다.

아래글은 워치만니의 책에서 발췌한 글이며,

영과 혼과 혼생명에 대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이해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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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영

믿는이들 자신에게 영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잠시 후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의 모든 관계가 다 이 영 안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믿는이들이 자기의 영을 모른다면 영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할 줄 모르게 되고 또한 생각이나 감정의 혼에 속한 부분으로 영의 역사를 대치하게 된다.


고린도전서 2장 11절은 사람 속에 영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고린도전서 5장 4절은 나의 영을 말한다.
로마서 8장 16절은 우리의 영을 말한다.
고린도전서 14장 14절 또한 나의 영을 말한다.
고린도전서 14장 32절은 선지자의 영을 말한다.
잠언 25장 28절은 자기의 영을 말한다.
히브리서 12장 23절은 의인의 영을 말한다.
스가랴 12장 1절은 여호와께서 사람 속에 영을 지으셨다고 말한다.

이 몇 구절들은 우리에게 사람의 영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이 영은 우리의 혼이 아니요 성령도 아니다.

우리는 이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경배한다.


성경의 가르침과 믿는 이들의 체험에 따라 볼 때,

사람의 영은 세 부분 또는 세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곧 사람의 양심과 직감과 교통이다(이것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가리키며 곧 경배이다).

 

1) 양심


 양심은 분별하는 기관이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양심은 생각의 지식의 영향을 받지 않고

천연적이고 직접적인 판단의 영향을 받는다.

많은 때 비록 일리가 있어도 많은 일에서 양심의 판단은 다를 수가 있다.

 양심의 역사는 대부분 일방적이고 직접적인 것이다.

이것은 밖에서 뭐라고 말하는 것에 의해 요동하지 않는다.

사람의 행위가 잘못되었을 때 양심은 참소의 소리를 발한다.

2) 직감

 직감은 사람의 영 안에 있는 지각이다.

이것은 몸의 지각과 혼의 느낌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것을 직감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러한 지각이 직접적이고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도움이 없이 생긴 지식은 직감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은 직감을 통해 한 가지 일을 참으로 「알 수 있다」. 사람의 생각은 단지 그것을 「깨닫게 할 뿐이다」.

믿는 이들은 이 직감으로 하나님의 모든 계시와 성령의 모든 움직임을 아는 것이다.

양심의 소리와 직감의 가르침은 믿는 이들이 응당 따라야 할 것들이다.

3) 교통

 교통은 곧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이것들은 다 혼에 속한 기관들임―는 하나님을 경배할 줄 모른다.

하나님은 생각으로 얻을 수 없고 감정이나 욕망으로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은 영 안에서 직접 아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경배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왕래는 다 직접적으로 영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혼이나 겉사람 안에서 진행되지 않고 「속 사람」 안에서 진행된다.


이것들을 본 후 우리는 양심과 직감과 교통의 이 세 부분이 어떻게 긴밀한 연합을 갖고 있고 서로 영향을 주는가를 알 수 있다.

양심과 직감은 서로 연결되었는데, 이것은 양심이 직감을 통해 판단하기 때문이다.

 양심은 직감을 따라 행하지 않은 행위를 그른 것으로 판단한다.

직감과 교통 혹은 경배도 서로 연결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직감 안에서 사람에게 알려지시고 직감 안에서 그분 자신과 그분의 뜻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원함과 추론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앞으로도 이에 대해 많이 언급할 것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만 말하겠다.


영은 양심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영이 곧 양심이라는 뜻은 아님).

다음 성경 구절을 보기로 하자.

『하나님이 … 그 영을 강퍅케 하셨느니라』(신 2:30).
『영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20).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영에 민망하여』(요 13:21).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그 영에 분하여』(행 17: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고전 5:3).
『내 영이 편치 못하여』(고후 2:13).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요』(딤후 1:7).
영의 직감(혹은 지각)의 기능에 대해 다음 구절들을 보기로 하자.
『영에는 원이로되』(마 26:41).
『예수께서 곧 영에 아시고』(막 2:8).
『예수께서 영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막 8:12).
『예수께서 영에 통분히 여기시고』(요 11:33).
『바울이 하나님의 영에 붙잡혀』(행 18:5).
『영 안에서 불타서』(행 18:25).
『이제 나는 영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행 20:22).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고전 2:11).
『저희가 나와 너희 영을 시원케 하였으니』(고전 16:18).
『그의 영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시원함을 얻었음이니라』(고후 7:13).
영 안에서의 교통(혹은 경배)의 기능에 대한 다음 구절들을 보자.
『내 영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 1:47).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요 4:23).
『내 영으로 섬기는 하나님』(롬 1:9).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롬 7:6).
『아들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7).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고전 14;15).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고전 14:16).
『영 안에서 나를 데리고』(계 21:10).

이 구절들을 읽고서 우리는 영 안에 적어도 양심과 직감과 교통의 세 부분이 포함된 것을 알 수 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아직 영생을 얻지 못했지만 그들에게도 양심과 직감과 경배가 있다(그때 그들이 경배하는 것은 악한 영이다).

단지 영의 나타남이 남보다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거듭나기 전에 허물과 죄로 죽어 있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신약 성경은 양심이 살아 있고 직감이 민감하거나 영적인 성향이 있고 취미가 있는 사람을 구원받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한 것들은 사람에게 영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데, 즉 혼의 이성과 감정과 의지 외에 따로 영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사람이 아직 거듭나기 전 그의 영은 하나님의 생명과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거듭난 후 비로소 하나님의 생명과 성령이 그의 영 안에 거하게 되어 그를 살리며 영으로 성령의 도구가 되게 한다.


우리가 영의 요점을 살필 때, 우리는 믿는이들로 하여금 사람에게 독립된 영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이 영은 사람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이 아니다.

영 안에는 양심과 직감과 교통의 기능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영역 안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를 가르치시며 그분의 안식 안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믿는이들은 이미 오랫 동안 영의 지배를 받았으나 영에 대한 지식이 너무나 빈약하다.

우리는 마땅히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여 체험 안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영에 속한 것이 무엇이고 혼에 속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믿는이가 거듭나기 전, 그의 영은 혼 안으로 타락하여 혼으로 포위되고 조성되어 혼과 하나가 되었다.

결국 영의 기능과 지각은 혼과 섞여져서 무엇이 혼에서 나온 것이고 무엇이 영에서 나온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향한 영의 주된 기능은 상실되고 이미 죽었다.

그러므로 영은 혼의 부속품같이 되어 버렸다.

혼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강해질 때 자연히 영의 기능은 사람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믿는이가 거듭난 후에도 혼과 영이 분리되는 역사가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고 읽어보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영은 그의 혼의 역사와 같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다음 구절들은 이것을 우리에게 증명해준다.

『그 영이 번민하여』(창 41:8).
『그들의 노한 영이 풀리니라』(삿 8:3).
『영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잠 14:29)
『영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어리석은 자는 그 노한 영을 다 드러내어도』(잠 29:11).
『영이 혼미하던 자도』(사 29:24).
『영이 상하므로 통곡할 것이며』(사 65:14).
『너희 영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느니라』(겔 11:5).
『너희 영에 품은 것을』(겔 20:32).
『그가 영이 강퍅하여』(단 5:20).

이 몇 구절들은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의 영의 기능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영의 기능이 혼의 기능과 얼마나 유사한가를 볼 수 있다.

여기서 그의 혼이 어떠하다고 말하지 않고 그의 영이 어떠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사람」의 가장 깊은 곳이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럴 때 사람의 영은 그의 혼의 지배를 받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영이 혼의 기능을 나타낸 것이다.

 이럴지라도 그의 영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영에서 나온 것들이다.

사람의 혼이 다스린다고 해서 결코 영의 기관이 잃어버린바 되거나 영이 무(無)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II. 혼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왕래하는 영 외에도 또한 혼이 있다.

이 혼은 곧 사람의 자각(自覺)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느끼는 것은 바로 혼의 역사이다.

혼은 우리의 인격적인 기관이다.

우리 인격에 포함된 모든 것 곧 우리로 사람이 되게 한 요소들은 다 혼에 속한 것들이다.

 우리의 지력과 생각과 이상과 애정과 자극과 판단력과 의지 등은 혼의 각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영과 몸, 이 두 가지에 대해 말했다.

 본래 이 둘은 다 혼 안에 융화되었기 때문에 혼은 사람의 개성이자 인격의 중심이 되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성경은 마치 사람에게 혼만 있는 것처럼 단순히 사람을 「혼」이라고 칭했다.

예컨대 창세기 12장 5절에서 「사람」은 원문에서 「혼」으로 되어 있다. 야곱이 온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갔을 때, 성경은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 혼이었더라』(창 46:27, 원문 참조)고 말했다.

원문 성경에서 사람을 「혼」으로 대치한 곳은 무수히 많다. 이것은 다름이 아닌 혼이 곧 인격이요 인격 안에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어떠함은 그의 인격에서 볼 수 있다.

사람의 존재와 특성과 생명 등은 다 혼 때문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을 혼이라고 칭했다.


우리 사람의 인격에 포함된 삼대 요소는 바로 우리의 의지와 생각과 감정이다.

의지는 우리가 어떤 주장을 내세우는 기관이고, 또한 우리의 판단력으로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치 않으며 무엇을 받고 무엇을 거절하는가 등을 표명한다. 이러한 의지가 없다면 사람은 기계가 된다.

생각은 사상을 내는 기관으로서, 이는 곧 우리의 지력(智力)이다. 우리의 총명과 지식 그리고 추리하는 것 등은 다 이 생각에서 나온다. 생각이 없을 때 사람은 완전히 어리석은 자가 된다.

감정은 우리가 사랑하고 미워하며 느끼는 기관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미워하며 희로애락을 느끼는 것은 모두 우리의 감정을 통해서이다. 감정이 없다면 목석과 같이 무감각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상고한다면, 인격의 삼대 요소가 다 혼에 속한 것임을 알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혼의 부분들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 구절이 너무 많은 고로 몇 구절만 예로 들겠다.

혼은 의지의 부분을 포함한다.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혼)에 맡기지 마소서』(시 27:12).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혼)에 맡기지 마소서』(시 41:2).
『너를 미워하는 블레셋 여자 곧 네 더러운 행실을 부끄러워하는 자에게 너를 붙여 임의로 하게 하였거늘』(겔 16:27).
『그 마음(혼)대로 가게 하고』(신 21:14).
『아하 소원(혼) 성취하였다』(시 35:25).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혼)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민 30:1).
『이제 너희는 마음과 정신(혼)을 진정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고』(대상 22:19).
『그들이 사모하여 그들의 혼을 들어 돌아와서 거하려 하는』(렙 44:14).
『이러한 괴로움을 내 마음(혼)이 만지기도 싫어하나니』(욥 6:7).
『이러므로 내 마음(혼)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욥 7:15).

여기의 「뜻」이나 「마음」이나 「정신」은 사람의 의지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마음을 정하여」나 「혼을 들어」, 「싫어하나니」, 「택하나이다」는 모두 의지의 활동들로서 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혼 안에 의지의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혼은 지력(智力) 혹은 생각의 부분을 포함한다.
에스겔 24장 5절은 그 마음(혼)의 간절히 생각하는 자녀를 말한다.
에스겔 36장 5절은 멸시하는 심령(혼)을 품는다고 말한다.
잠언 19장 2절은 지식 없는 혼은 선치 못하다고 말한다.
시편 13편 2절은 내가 내 혼에 경영한다고 말한다.
시편 139편 14절은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혼이 잘 아나이다라고 말한다.
예레미야 애가 3장 20절은 내 혼이 줄곧 그것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잠언 2장 21절로 22절은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 그리하면 그것이 네 혼의 생명이 되며라고 말한다.
잠언 24장 14절은 지혜가 네 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 「경영」, 「생각함」, 「품는다」 등등은 모두 사람의 생각 혹은 지력의 기능이다. 성경은 이 모든 것을 혼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그러므로 우리는 혼 안에 사람의 지력 혹은 생각의 부분이 내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혼 안에는 감정의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혼 안에는 애정이 있다.
신명기 6장 5절은 마음(혼)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사무엘 상 18장 1절은 요나단의 마음(혼)이 다윗의 마음(혼)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혼)같이 사랑하니라고 말한다.
신명기 14장 26절은 혼에 좋아하는 것 … 네 혼에 원하는 것을 말한다.
사무엘 20장 4절은 네 혼의 소원이 무엇이든지라고 말한다.
시편 84편 2절은 내 혼이 주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했다고 말한다.
에스겔 24장 21절은 너희 혼에 아낌이 된다고 말한다.
시편 42편 1절은 내 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이사야 26장 9절은 밤에 내 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혼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12장 18절은 내 혼에 기뻐하는 바를 말한다.
누가복음 1장 46절은 내 혼이 주를 찬양한다고 말한다.
누가복음 2장 35절은 또 칼이 네 혼을 찌르듯 하리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은 혼에 사모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무엇을 사모하는 사람의 행위는 혼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의 감정은 혼의 일부분이다.

혼은 미워할 줄도 안다.
욥기 33장 20절은 혼이 별미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사무엘 하 5장 8절은 다윗의 혼에 미워하는 절뚝발이라고 말한다.
스가랴 11장 8절은 내 혼에 그들을 싫어하였다고 말한다.
욥기 10장 12절은 내 혼이 살기에 곤비하다고 말한다.
시편 107편 18절은 혼이 식물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여기 구절들은 미워하는 것이 혼의 활동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혼은 또한 자극을 받는다.
사무엘 상 30장 6절은 백성의 혼이 슬프다고 말한다.
열왕기 하 4장 27절은 혼에 괴로움이 있다고 말한다.
사사기 10장 16절은 혼이 근심한다고 말한다.
욥기 19장 2절은 내 혼을 번뇌케 하였다고 말한다.
이사야 61장 10절은 내 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한다고 말한다.
시편 86편 4절은 주의 종의 혼을 기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시편 107편 5절은 혼이 낙망한다고 말한다.
시편 116편 7절은 내 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라고 말한다.
시편 119편 20절은 혼이 상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시편 119편 28절은 나의 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라고 말한다.
잠언 16장 24절은 혼이 달다고 말한다.
이사야 55장 2절은 혼이 즐거움을 얻는다고 말한다.
요나서 2장 7절은 내 혼이 내 속에서 피곤하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26장 38절은 내 혼이 심히 고민하여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12장 27절은 내 혼이 민망(근심)하니라고 말한다.
베드로후서 2장 8절은 의인이 그 의로운 혼을 상하니라고 말한다.
이 성경 구절들은 혼이 어떻게 자극을 받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자극은 혼에서 나온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것을 볼 때에 우리는 감정의 모든 역사, 즉 애정과 「자극」과 「감각」 등은 다 혼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감정도 혼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한다.

III. 혼 생명

성경을 읽는 사람들 중에 어떤이들은 「생명」이 헬라어에서 세 단어로 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1)「비오스」(bios) 2)「슈케」(psuche) 3)「조에」(zoe)이다. 이 세 단어가 다 생명을 말하지만 그들이 가리키는 생명의 의미는 각각 다르다.

「비오스」는 육신의 생명을 말한다.

주 예수님이 과부가 「생계비」 모두를 다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씀하셨을 때 사용한 단어가 바로 이것이다.

 「조에」는 가장 높은 생명이자 영의 생명이다. 성경에서 영「생」이라고 한 곳에는 다 「조에」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슈케」는 곧 유기적 생명으로서 이는 사람의 천연적인 생명이자 혼의 생명이다. 성경에서 사람을 말할 때에는 항상 이 단어를 사용했다.


이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에서 사용한 「혼」과 「혼 생명」이라는 단어이다.

 원문에서 이 두 단어는 동일한 단어이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쓰여졌고 신약은 헬라어로 쓰여졌다.

구약에서 「혼」을 말할 때 「네페쉬」를 사용했고 「혼 생명」을 말할 때에도 「네페쉬」(Nephesh)를 사용했다.

신약에서 혼을 말할 때 「슈케」를 사용했고 「혼 생명」을 말할 때에도 「슈케」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러므로 우리는 혼이 어떻게 사람의 세 가지 요소 중에 하나이며, 또 혼이 어떻게 사람의 혼 생명이며 천연적인 생명인 가를 볼 수 있다.
성경의 많은 부분은 「혼」을 「생명」 혹은 「목숨」으로 번역했다.
예를 들어,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창 9:4).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레 17:11).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마 2:20).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눅 6: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행 15:26).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마 20:28).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15, 17).

이상의 구절들에서 말한 「생명」, 「목숨」은 원문에서 모두 「혼」이라는 단어이다.

그러나 이것을 혼으로 번역하면 읽기가 어렵기 때문에 무의미한 문장이 된다. 그러나 원문에서 이렇게 혼이라고 한 것은 혼이 사람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혼」은 사람의 삼대 요소 중 하나이다.

「혼 생명」은 사람의 천연적인 생명으로서 이는 사람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생명이다.

곧 유기적인 것을 사람에게 주는 생명으로서 사람이 그로 말미암아 사는 생명이다.

또는 능력을 사람에게 주어 사람으로 살게 하는 생명이다.

성경이 「혼」과 사람의 생명에 대해 「네페쉬」와 「슈케」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분리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분리 할 수 있는 이유는 성경의 어떤 곳에서는 「슈케」를 「혼」 또는 「생명」이라고 번역해야 하고 서로 뒤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예로 누가복음 12장 19절부터23절과 마가복음 3장 4절의 「혼」과 「생명」과 「영혼」은 원문에서 같은 단어이지만 결코 동일한 단어로 번역될 수 없다.

분리할 수 없는 이유는 이 두 가지가 사람 속에서 완전히 융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때 무의미한 말이 된다.

성경에는 육체에 속한 사람에게서 혼을 제하여도 생명이 남아 있다고 말한 곳이 없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사람의 생명은 단지 몸 안에 있는 혼에 침투되어 있을 뿐이다.

혼이 몸과 연합할 때 혼은 곧 사람의 생명이 되었다.

생명은 혼의 현상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신의 생명이 곧 혼 생명이기 때문에, 성경은 현재 사람의 몸을 「혼에 속한 몸」(고전 15:44)으로 여겼다.


이 혼은 바로 우리 사람의 생명이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느냐 혼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느냐를 결정해 주는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에 대하여는 나중에 더 언급하기로 하자.


우리는 성경의 많은 말씀으로 혼에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관이 포함되었음을 증명하였다.

 우리는 사람의 사상, 상상, 결정, 느낌, 감정, 자극, 사모 등의 모든 현상이 모두 혼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생명이 연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생활은 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천연적인 것 안에 포함된 인격의 모든 것은 혼의 각 부분이다.

혼 생명은 바로 사람의 천연적인 육신의 생명이다.

이상의 성경에서 말한 사모함, 미워함, 지식, 모략, 번민, 기뻐함, 마음을 정함 등의 모든 활동은 다 혼 생명의 기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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