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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 re:re: 니의 성령의 두방면(위에,안에)은 과연 옳은가? 작성자 참사랑
작성일 2007년 8월 3일 조회수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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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양무리마을(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에서 카페지기 '홀리조이'란 분이 <<신약적 관점에서 본 워치만 니의 성령론 >>을 번역한 글중에서, 한나님이 말씀하신 성령의 두가지 방면에 대한 부분을 발췌한 글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을 "In(안에)"로 보시는 관점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부분은 현재 제가 제기하고 있는 핵심주제(삼위일체, 그영)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약간은 거리감이 있어서 다음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나님께서도 너무 자신의 관점만을 확신하기 보다는 좀더 시야를 넓히시기를 바랍니다.
(이하는 요약 발췌글입니다)

------------------------------------------------------------------------>>

Archie Hui박사는 스코틀란드 에버딘대학에서 에베소서에 나타나는 성령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그리고 성령론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워치만 니의 성령론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역자: 홀리죠이).

 

B. 부어지신 성령과 내주하시는 성령

 위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II.워치만 니의 성령론),

니는 신자의 봉사를 위한 능력을 위한 성령의 외적 역사(이것은 성령이 신자 '위'에 외적으로 내리게 될 때 주어진다)와

신자의 영적 갱신에 이르게 하는 성령의 내적 역사(이것은 성령이 신자 '안'에 내적으로 임하게 될 때에 일어나게 된다)를 구분하고 있다(니의 이러한 구분은 D.L.Moody의 견해와 비슷하다. D.L.Moody, Power from on High, London: Morgan and Scott, 1992,31-55를 참고하라. 니가 무디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Nee, Collected Works, 17:412-14;Life, 126-28), 무디에게서 영향을 받았는지 아닌지 명확하지가 않다).

 

성령충만에 관한 두 개의 표현을 그가 다루는 것(바로 III의 A에서 설명한 것)과 비슷하게, 니는 다소 이런 전치사구절들을 전문적인 표현들로 간주해서 성령의 두 가지 다른 종류의 활동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다시금, 터너(Turner)는 주장하기를 이러한 전치사구절들은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것들은 단지 '동일한 실재를 나타내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공간적 메타포들: 곧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의 그 삶을 통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메타포들인 것이다(Turner, 'Some Linguistic Considerations', 48).


신약성경에서 예수의 경우 세례 요한에게 그가 세례를 받을 때 보여진다.

마가복음1:10에서는 성령이 '그에게'(into him, eis auton) 내려서 들어가셨다고 하는 반면에, 마태복음3:16과 누가복음3:22에서는 성령이 '그 위에'(upon him, ep' auton) 내려오셨다고 한다.

마가복음과 다른 공관복음서 상에 서로 심각한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서로 다른 전치사들이 예수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 성령께서 하신 일이 아주 다른 타입의 일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결국 세 개의 공관복음서들 모두는 예수를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케하시는 성령님으로 충만하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각도에서, 70인경이라는 구약성경의 헬라어번역판에서 보여지는,

모세 "위에"(on, epi) 내리셨던 성령이나

요셉 "안에" (in, en, 창41:38),

여호수아 "안에"(민27:19),

또한 다니엘 "안에"(단5:11)

오셨던 성령 사이에 어떤 의미심장한 차이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의심스럽다(워치민 니는 아쉽게도 이렇게 구약성경이나 70인경에 나오는 구절들을 간과한 것처럼 보인다. Collected Works, 21:17, 105; Communion, 49-50, 79-80 참고할 것).


모세와 여호수아의 경우를 특별히 살펴보기로 하자. 민수기27:12-23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모세를 이어서 지도자사역을 하게 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사람들의 삶과 사역에 영향을 끼친 성령의 역사 사이에 어떤 의미심장한 차잇점들이 있다고 보는 것은 의심스러운 견해이다.

두 명 모두 이스라엘백성들을 인도하도록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다. 광야에서이든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서 하는 일을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터너(Turner)가 정당하게 지적하기를, 이런 공간적 메타포들을 저자가 의도하는 제한적 의미를 넘어서서 적용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Some Linguisitic Considerations",49).

 

성령이 어디로서부터 오시는 것인가 ?  그리고 성령께서 정확하게 어디로 임하시는가?  하는 것을 질문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성령께서는 하늘로부터 오시고 또한 마리아(눅1:35), 예수(3:22), 혹은 신자들(행8:17,10:44,11:15,19:6) 등에게로 임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또한 알아야 할 것은, 성령께서 문자적으로 "하늘 위 어떤 곳 위"에 계신다거나 어떤 신자들의 "위"(upon)나 "안"(in)에 문자적으로 오신 것이라고 누가가 보고 있지 않다는 어떤 센스가 있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누가에 따르면 빌립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설교할 때에도 그와 함께(with) 있었고(행6:3-5),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에게 전도할때에 함께(with) 하였고(2:4,4:8,31,5:3,32), 또한 바울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안수하였을 때도 함께(with) 하셨던 것이다. 

  더욱 중요하게도,우리는 똑같은 종류의 메타포가 성령과는 관계없이 다른 것을 언급할 때에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누가는 두려움이 사람들에게 "임하였다"(coming down, 눅1:16, 행5:5,11), 사람들의 운명이 그들에게 '임하였다'(coming upon, 눅21:26,행8:24,13:40), 혹은 재난이 이집트와 가나안사람들에게 '임하였다'(coming down, 행7:11)고 한다. 

우리들은 두려움이나 재난이 그것이 임하는 사람들에게 내적으로 임하지 않고 외적으로만 영향을 입혔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처럼 우리들은 재난이란 것이 이집트와 가나안의 외곽에만 영향을 입히고 그 땅의 내부에는 전혀 영향을 입히지 않은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된다.  

이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성령이 어떤 사람 "위"(upon)에 임하는 것과 그 사람 "안"(in)에 거하시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차이가 있다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는 것"(Spirit-fullness, 'filled with the Holy Spirit')과 "성령으로 충만한 것"(full of the Holy Spirit) 사이에 있는 표현상의 차이와 유사하다.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upon) 내려오신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순간에 혹은 이 순간부터 앞으로 성령께서 그 사람의 삶 속에서 어떤 식으로 역사를 시작하신다는 뜻이다. 그 사람이 마리아이든(눅1:35), 예수님이든(마3:16,눅3:22,요1:33), 초대교회의 제자들이든(행1:8,2:17-18), 코넬료와 그 집 사람들이든(10:44-45,11:15), 에베소의 신자들이든(19:6) 그렇다. (이 점에 대하여 또한 70인경 민수기11:17-29[70장로들],23:7[발람],24:2[발람], 사사기3:10[옷니엘],11:29[입다], 14:6[삼손], 사무엘상10:10[사울], 11:6[사울],16:13[다윗],19:20[사울의 부하들],23[사울],역대하15:1[아자리야], 20:14[야하시엘], 에스겔2:2[에스겔],3:24[에스겔]을 참고하라.  70인경에 있는 이런 표현들에 대한 연구로서 Roger Stronstad, The Charismatic Theology of St.Luke[Peabody:Hendrickson, 1984],18을 참고할 것).

 

성령이 어떤 사람 "안에"(in)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령이 이미 현존하고 있는 그 사람 속에서 계속 활동 중이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성령께서 요셉 안에(70인경 창41:38), 여호수아 안에(70인경 민수기27:18), 다니엘 안에(70인경 다니엘5:11), 구약의 선지자들 안에(벧전1:11) 혹은 신약의 신자들 안에(요14:17, 롬8:9, 11,고전3:16,6:19,고후1:22, 딤후1:14,약4:5) 그렇게 활동 중이셨다.

 

하지만, 이러한 유입적-정태적 구분(inceptivie-statvie distinction)은 절대적인 구분이 아니면 약간 설명이 더 필요하다.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upon) 이미 임하여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또한 가능한데, 모세(70인경 민수기11:17,25), 70인 장로들(70인경 민수기11:25-26), 엘리사(70인경 4 Kgdms 2:15), 그리고 시므온(눅2:25)의 경우에 그렇다.

이런 경우들에 있어서, 두개의 전치사적인 표현들 사이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요약하자면, 우리들은 '위에'(upon)이라는 표현이 '안에'(in)이라는 표현보다는 좀 더 유연성이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위에'(upon)이라는 말로 성령의 임하시는 것과 머물러 계시는 것을 그 앞에 있는 동사에 따라서 모두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수반되는 동사는 ginomai, ekcheo, ekchunno, epanapauuo anapauo, epipipto, epitithemi, erchomai, eperchomai, ephallomai, hallomai, katatbaino, kateuthuno, 혹은 meno 등이 될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은 유입적인 동사이지만, 또한 어떤 것은 정태적인 동사이기도 하다): 유입을 나타내는 동사 다음에 '위에'(epi)라는 전치사가 이어지게 되면 그것은 성령님의 임재가 시작되는 것(유입)을 암시하는 반면(마3:16,눅1:35,3:22,행1:8), 정태적인 동사 다음에 '위에'(epi)라는 전치사가 따라 오면 성령님의 지속적인 현존을 암시한다(70인경 민수기11:25-26,4 kgdms 2:15,눅 2:25, 벧전4:14).

요한복음1:32-33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예수의 존재(person) 안에 성령님께서 지속적으로 계신 상태에서 새롭게 다시 임재하신 것을 나타낸다는 면에서 약간 특별한 면이 있다.

참사랑
윗글에서 우리는 성령의 '위에' , '안에"의 의미로 신,구약을 나누는 것이 문제가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설사, 두 방면이 역사하시는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 하더라도, 신,구약을 두 방면으로 구분하는 것은, 이것 역시, 과정을 거쳐 완결된 새로운 <그 영>의 논리를 위한 방편책일 것입니다. 기본전제를 부활전후의 del modify 2007/08/03
참사랑
시점을 기준으로 잡다보니, 성령의 '위에'와 '안에'의 개념까지도 신,구약으로 나누는 사태를 초래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으로 보건데, <그 영>의 잘못된 관점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부분들이 과녁을 빗나가는지를 단적으로 알수 있는 부분입니다. del modify 2007/08/03
참사랑
한나님의 답글에 대한 답글은 내일쯤에나 올릴수 있겠습니다. 우선, 먼저 말씀하신 성령의 두방면에 대한 부분을 참고삼아 올려둡니다. del modify 2007/08/03
형제
양무리 마을은 자신들의 마음에 안 들면 (지방)교회 지체들이 반박할 기회를 원천봉쇄한 경험이 있습니다. 위 자료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런 곳의 자료를 이곳에 퍼오는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내재적 삼위일체 방면(요14:10-11)과 경륜적 삼위일체 방면(마3:16-17)을 구분하는 것은 정통 신학의 흐름입니다. 어느 한쪽 del modify 2007/08/04
형제
의 글을 절대기준으로 삼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학자들의 의견은 검증을 거치기 전에는 상대적이고 비판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위 글을 쓴 분의 신학이 절대기준이 될수 없습니다. del modify 2007/08/04
참사랑
님은 여전히, 색안경으로만 보시는 군요. 위의 글에서, '양무리'란 단어만 눈에 들어오시는가 봅니다..ㅠㅠ. 한나님이나 스타로우스님처럼, 상대방이 제시하는 것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답변하실수는 없습니까? 다른분들의 좋은 점을 배울필요가 있어보입니다. 무조건 욱박지른다고 문제가 해결도는 것은 아님 del modify 2007/08/04
Hannah
제가 전에 이 글을 읽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때 성령의 역사를 '메타포(은유)'로 간주하는데 제가 말문이 막혔었습니다. 일단 성경안에서 '안에'와 '위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으며, 또한 안에가 충만해지면 밖의 능력을 체험하는것, 본질적인 것과 경륜적인 것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역사가 있음을 알아야함 del modify 2007/08/04
참사랑
위에,안에의 차이가 없다고 하지는 않는것같은데요..그것을 신구약으로 나누것이 문제라는 것이 핵심취지 아닌가요? 그영으로 변화를 시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헌데, 갈수록 이상한 생각이 드는군요. 왜 핵심이되는 질문들은 모두들 피해가시고, 주변만 얘기들하시는지..그정도의 자료가 축적되어 있으면, 간단명료하게 del modify 2007/08/04
참사랑
답을 하시면 되는데, 자꾸만 알면서도 회피하는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좀더, 핵심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지방교회의 입장은 정리되어 있을것이니,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거이라 생각되구요. del modify 2007/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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